‘4류 국민’에서 벗어나려면
‘4류 국민’에서 벗어나려면
  • 전주일보
  • 승인 2020.02.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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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설마 더 이상의 막장 논픽션 정치드라마가 연출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4년 전 20대 총선을 앞두고 펼쳐졌던 당시의 집권 여당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은 우리 정치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막장 드라마였다. ‘친박비박으로 갈라지고, 친박은 다시 진박을 가린다며 망나니 칼춤 추듯 공천의 칼날을 휘둘렀다. 특정인을 배제하기 위한 인간성 말살의 행태, 그 칼날을 막겠다는 당 대표의 옥새파동은 국민들로 하여금 이것이 과연 집권세력의 모습인가 하는 탄식과 함께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21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전개되고 있는 정국은 당시의 모습이 단지 예고편에 불과했음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1 야당에선 개정된 선거법의 비례대표 확보를 위한 위성정당이 나왔고, 2 야당에선 의원직을 유지한 채 신당으로 말을 옮겨 타기 위한 셀프 제명의 희극이 연출됐다.

21대 총선을 겨냥한 살풍경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청와대 출신 대량 동원과 조국 수호 논란은 4년 전 친박공천 논란의 어김없는 데자뷰다. 여기에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진영과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군소 3당의 이합집산은 한국 정치의 고질인 철새정치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아수라장으로 치닫는 총선정국

 

소극(笑劇)성 비극으로 전개되고 있는 총선 정국은 논리학의 한 명제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성찰이다.

자라는 것들에 대한 논리적인 질문의 살아 있는 명제인 테세우스의 배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된다. 경우에 따라선 배의 부품을 교체하면서 원래 부품은 모두 창고에 두었다가 모두 교체한 뒤 창고에 모인 부품으로 배를 하나 조립했다면 무엇이 진정 원래 배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온갖 편법과 정략으로 세 불리기에 나서는 각 정당들은 새로운 미래로 나가기 위한 새 배를 건조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 배의 본질과 기능은 낡은 그대로인 채 단지 그럴듯한 모습으로 분식(粉飾)했을 뿐이라고 냉소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정치판은 난장을 이루다 못해 아수라장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판과 국민들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인식의 괴리를 보면서 정확히 4반세기 전 한 재벌총수가 정치판을 향해 던졌던 독설을 듣게 된다.

기업은 2, 정부는 3, 정치는 4.” 1995년 북경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이 특파원들을 앞에 두고 토해낸 어록이다. 이 회장은 이 발언으로 3당 합당을 통해 대권의 꿈을 이뤄 기세등등하게 문민정부의 기치를 내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호된 질책을 받는 곤욕을 치렀지만, 그 말은 나라와 국민은 도외시한 채 정파적 이익만 추구하는 21대 총선 정국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 재벌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 삼성과 막장의 끝을 달리는 정치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실체적 진실로 입증되고 있다.

더 뼈아픈 지적은 윈스턴 처질의 경구다.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 처칠의 아포리즘과 이건희 회장의 진단을 삼단논법으로 연결하면 우리 국민들도 정치의 수준과 동급인 4류로 전락하게 된다.

현실 인식은 각성을 일으킨다. 어떻게 4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간단하다. 지도자를 1류로 만들거나 1류 지도자를 뽑으면 된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돌아볼 때 4류의 정치인들이 1류로 환골탈태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따라서 남은 방법은 1류를 선별해 새판을 짜는 수밖에 없다. 50여일 앞으로 다가온 총선의 의미가 무한으로 확장되는 대목이다.

 

앙시앵 레짐회귀의 반동을 심판해야

 

그렇다면 21대 총선이 4류의 정치를 1류로 탈바꿈시키는 한국 민주주의의 축제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정치현실을 돌아보면 암담하기 짝이 없다. 촛불혁명은 4류 정치인들을 향해 1류가 되라는 국민적 명령에 다름 아니었다. 초유의 절대 권력 탄핵을 이끌어낸 국민들의 성숙한 의식과 행동은 세계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위험한 민주주의>(원제 국민대 민주주의 : The People Vs Democracy’)의 저자인 야스차 뭉크는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스트롱맨이 독재로 나가는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와 테크노크래트의 과두제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민주주의 없는 군리 보장의 세계적 현상을 주목하며 자유민주주의가 일대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한다. 그런 그가 한국이 촛불집회를 통해 권위주의로의 후퇴를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고 덧붙인 예외적인 평가는 우리의 자부심을 한없이 고양시킨다.

그러나 그의 찬사는 불과 3년여 만에 헛말이 되고 있다. 촛불은 섬광으로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자크 아탈리가 <미래의 물결>에서 아프리카가 유럽을 닮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 아프리카 정치를 닮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 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여야 어느 한쪽으로부터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며 정권을 안겨준 집권세력은 정의를 외치며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의는 내로남불의 이중의 정의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맞은편이 어둠을 깨치고 대안세력으로 떠오른 것도 아니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는 두 가지 의미에서 중대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는 방향의 위기와 사회적 믿음이 붕괴되는 해체의 위기가 겹쳐 나타나고 있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국가와 민족, 미래와 개혁을 내걸고 굉음으로 울려대는 각 정파의 독전고(督戰鼓)에 휘둘리지 않고 국민들이 얼을 똑바로 차리는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정파를 가리지 않고 앙시앵 레짐으로 회귀하려는 반동의 몸짓을 제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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