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歸省)
귀성(歸省)
  • 전주일보
  • 승인 2020.02.0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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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문 광 섭/수필가
문 광 섭/수필가

내일부터 설 연휴가 시작되는 음력으로 섣달그믐이다. 벌써 민족의 대이동은 시작된 것 같다. 교통체증과 혼잡을 피해서 서둘러 일찍 떠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전주까지 9~10시간 걸리던 것이 고속도로 확장과 고속철도, 청년 인구 감소, 역귀성 등으로 지금은 4시간 남짓으로 줄었고, 귀성 인파도 따라서 준 듯하다. 언제든 2시간 남짓이면 전주까지 올 수 있으니 기를 쓰고 귀성해야 할 이유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나이 탓인지 이른 아침부터 전화기 벨 소리에 민감한 반응이 일었다. 서울에 사는 큰애 소식이 궁금해서다.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올해는 못 내려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큰애는 본래 나에겐 전화를 잘하지 않는다. 집사람 눈치를 보아 감을 잡거나 먹거리 준비하는 것을 보고서 짐작해왔다. 그런데 어쩐지 아내의 발걸음이 느려 보이고, 부산함이 보이질 않았다. 아마 제 어미한테는 전화했지 싶다. 나와 대화가 소원한 것은 서로의 성격 탓이기도 하고, 하는 사업이 유통업이라 명절 안 날까지 일을 하는 모양인데 뭐라고 하기도 부담스럽다.

 

큰애한테 전화 왔어?”

아침에 나갈 적에 이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불쑥 던졌더니, 그렇게 눈치도 없냐는 듯 도끼눈을 흘긴다.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내방으로 얼른 피해버렸다. 불똥이 내게로 오기 십상이어서 그랬다. 아들을 생각하는 어미 속마음에 비한다면 나야 비할 바가 되기나 하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젯밤 아내가 밤새 하던 기침도 사실은 큰애 생각에 잠들지 못해 그랬던 것이리라. 그때 짐작할 것을 공연히 불 집을 건드린 셈이니······.

 

문득 50여 년 전의 귀성 모습이 동영상처럼 스친다. 석탄 열차에 피난민처럼 매달려 내려오거나 트럭을 타고서 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고향으로 내려갔다. 시외버스는 콩나물시루처럼 태워서 실어 날랐고, 큰 회사에서는 전세버스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고속버스가 생기기 전의 일이다. 그렇게 교통사정이 좋지 않은 시절에도 고향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설레었다. 객지로 나간 사람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 말고도 친척, 친구, 여자 친구 등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많아서 내려가지 않으면 한()이 되었고, 부모는 목이 빠지는 기다림 가운데 자녀들이 도착하면 이산가족 만남 이상의 반가움이 넘쳤다.

 

설은 우리민족의 고유 명절이다. 일본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에 양력설을 강제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음력설은 수 천 년을 이어온 전통으로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나서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며 한해의 무사와 가족의 단합을 다지는 자리였다. 정월 대보름까지 일가친척과 교유하고 음식을 나누며, 가족공동체로서 화합과 친목을 다졌다. 집안 형제가 팔 구 남매되는 집은 마치 집안 잔치라도 여는 양 법석댔다. 마을 단위의 결속 수단도 되었다. 교통수단과 통신 시설이 취약했던 시절이라 객지로 나갔던 사람들은 반년이나 일 년 내내 궁금해 있다가 명절 때 돌아와 회포를 풀기 때문에 귀향은 삶의 일부분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시골을 좋아하기에 추억거리가 많다. 봄이면, 학교가 끝나고 동산에 올라 토끼를 쫓거나 아름다운 꽃밭에서 놀았다. 여름이면 미역을 감거나 물고기를 잡았고, 가을엔 알밤을 주웠다. 겨울엔 눈썰매를 타거나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철마다 즐기며 놀았다. 명절이면 일가친척도 많아서 6촌 내외 친척들이 법석을 떨었다. 아직도 시골의 순박한 정서와 포근하고 아늑하던 추억이 그대로 가슴속에 살아있다.

한데, 50줄에 들어선 내 자녀들은 고향이 없는 것 같다. 도시에서 태어났고 성장했으며,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고향이라는 의미가 퇴색했지 싶다. 서울에 사는 큰애에게서 고향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려오고픈 마음도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추석날 성묘도 그렇고, 4촌 형제는 그만두고 형제간 만남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 여겨진다.

예전의 우리는 살기가 어렵고 힘들어도 고향을 찾았고, 다녀와야 직성이 풀렸다. 고향은 바로 어머니 품 안이었다. 6촌 형제도 한 형제처럼 생각되었고, 집안 어른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추석 성묘 때 뵈었으니 불과 넉 달 보름밖에 안 되건만, 몇 년 만에 뵙는 듯 반가움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었다.

 

한데, 설이 다가와도 예전처럼 반가움도 설렘도 일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나이 탓인가. 아니면, 시대가 변하고 우리 아이들의 특별한 사유(思惟)와 가족공동체 와해에서 오는 영향인가? 아이들의 세배도 세배 같은 느낌이 없을 뿐 아니라 분위기도 도무지 설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나만의 부정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탓인가? 남의 집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유독 나만이 겪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생각해보면 지난날 살기 바빠서, 하는 일에 파묻혀 내가 아이들에게 고향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고향을 아예 모르고 사는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과 자주 고향을 찾아가고 놀아주고 그 소중함을 일깨우지 못한 죄로 오늘 이런 쓸쓸한 설이 내게 닥쳤으리라 생각한다. 그 소중한 유산을 물려주지 못해 안타까움으로 자책하는 설 명절의 속내를 뉘에게 하소연하랴.

 

그 옛날 교통이 불편했고 가난했어도 인정이 넘치고 사람 냄새가 나던 설날이 마냥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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