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여는 새해
시(詩)로 여는 새해
  • 이현재
  • 승인 2020.01.0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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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 /논설위원
이 현 재 /논설위원

한 해의 수미(首尾)가 바뀌었다. 그래봤자 하룻밤 사이거니 해도 새해에 대한 정회는 새롭다.

막연하지만 뭔가 부풀어 오르는 마음과 다시금 다져보는 의지. 새해는 해마다 되풀이하지만 그 기대감으로 인해 언제나 희망으로 다가온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구상 새해에서

하지만 천도(天道)의 순환은 무왕불복(無往不復), 한 번 가면 오지 않는다. 그러니 지난해에 대한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 미련을 제야(除夜)의 종소리에 실어 영원 속에 묻는다.

이제는 그대와 작별할 때/ 저 광막한 우주 속으로/ 별이 되어 떠나는 그대여/ 잘 가라 잘 가시라’ -강인환 제야에서

 

새벽시장 모닥불로 지피는 희망

 

새해가 왔건만 겨울은 오히려 깊어진다. 대기의 냉기가 더해지고 대지는 더욱 얼어붙고 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고공철탑 위에서, 새벽 인력시장에서, 온몸으로 추위를 맞으며 지난해의 찢어진 캘린더를 여전히 내걸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의 섬 속에 유리돼 있는 사람들이다.

동토의 섬에서 흘리는 그들의 눈물로 인해 우리의 겨울은 계속된다. 무엇을 위한 풍요인가,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무엇이 땅속에 남아 괴로워할까/ 저 야마천(夜摩天)에는 풀 한포기라도 돋아나 있는지’ -고은 눈물에서

원단(元旦)의 새벽 거리를 나선다. 남루한 인력시장 사무실에 희미한 형광등이 켜져 있다. 한 달이면 그래도 보름은 채워졌던 일거리가 이젠 사나흘이나 될까 말까 할 정도로 부쩍 줄었다. 더불어 삶도 한결 고달파졌다. 아침녘이면 그들은 타들어가는 담배에 추위를 녹이며 한줌 볕을 쫓아 서성거릴 것이다.

전주 남부시장에 들른다. 사위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찾는 이 없어 휑한 거리에 노점상 몇몇이 빈 깡통에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그 모닥불에 기대어 생의 의지를 지핀다.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안도현 모닥불에서

추위는 이제부터지만 태양의 고도는 이미 지난 동지에 저점을 통과했다. 그로부터 초동(初動)의 일양(一陽)이 생성되기 시작했으니 밤은 조금씩 줄고 낮이 길어지고 있다. 다만 그동안 길었던 밤으로 인해 발달했던 북극 상층의 찬 공기가 한 달여 동안 더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후 설쯤에야 풀리기 때문에 새해 벽두에 추위가 맹위를 떨칠 뿐이다. 그러니 낮이 밤을 극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그와 함께 동토 아래에서 생명들도 조용히 피어나고 있다.

시인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통찰하며 죽음 위에 생명의 싹을 틔운다. 수녀 시인 이해인은 저무는 해를 보며 봄을 품은 새해를 향해 어서 오라고 초대장을 보냈다.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12월의 엽서에서

나목(裸木)은 존재의 정핵이다. 봄의 꽃, 여름 이파리, 가을의 단풍을 온전히 쏟아내고 결빙의 끝에 선 나목은 인간에게 ,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서 답을 구한 나목은 다시 생을 준비한다.

마른 대궁이는/ 금년의 화초(花草)/ 땅 속에는 내년의 뿌리’ -박목월 내년의 뿌리에서

 

‘2020,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4계절을 순환하는 자연의 변증법은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사의 변증법은 종종 소외와 배제,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한 거대한 소외지대를 낳는다. 그들에게 봄은 영원히 오지 않는 실낙원이다. 그러니 그들의 봄을 만들어줄 온기가 필요하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가슴에 차오르는 욕심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나눔으로 행해진다.

가을 끝낸 들판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김남주 사랑은에서

동네 가게의 붕어빵은 1,000원에 4개다. 반 평도 안 되는 거리의 포장마차 붕어빵은 1,000원에 2, 2,000원에 5개다. 가격을 따진다. 사랑의 결핍증에 걸린 나를 본다. ‘에 갇힌 이들의 슬픔이 느껴진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에서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정의도 나눔과 사랑의 다른 이름에 다름 아니다.

너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부귀를 최대한 성취하라.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당신의 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 중 일부는 사회에 환원하라.’ 현대 정치철학의 거장 존 롤스 <정의론>의 요체다.

당신의 재능은 우연히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며, 그 재능을 평가하는 사회와 시대에 우연히태어나, ‘우연히부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으니, ‘우연의 소산인 그 일부는 사회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롤스는 우연히재능을 남보다 덜 타고나 사회적으로 뒤처진 사회적 최소 수혜자에게 재분배가 집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와 함께 음미해 볼 대목이 언제냐는 물음이다.

서양 속담은 지체된 정의는 정의의 부정이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고 단언한다. 유태인의 지혜서인 <피르케이 아보트(탈무드)>정의의 지체와 부정이 세상에 칼을 불렀다고 한 걸음 더 나간다.

새해 벽두에 그 당위가 우리에게 묻는다. 2020,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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