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덤’의 돛으로 새해의 항해를
‘세덤’의 돛으로 새해의 항해를
  • 전주일보
  • 승인 2019.12.2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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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2019년도 마침내 끝자락이다. 닷새 후면 2020년 첫날이 열린다. 해가 갈수록 더해지는 것은 세월의 무게와 속도감이다.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나이 수에 거리의 단위인 km를 붙여 세월의 속도계를 말하지만 황혼으로 치닫는 이들에게 이는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뜬 구름 같은 세월 속에 속절없이 한 장씩 지워지는 인생의 소멸을 돌아보며 허무와 회한에 젖는다.

하기야 인생이 어디 365일을 단위로 하는 연()으로 해서 돌아가는 것인가. 사람들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 촌각으로 흐르는 시간을 모아 날()과 달(), 연으로 구분할 뿐이다. 그래도 1년을 단위로 시간을 끊어 매듭을 짓는 것은 과거의 거울에 미래를 투영해 한정된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절박함 때문이리라.

 

초고속 사회가 낳은 불평등

 

저문 해는 사유와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그래보았자 남은 것은 99%의 후회와 1%의 보람뿐이다. 다시 새해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경험상 그 또한 부질없음을 직감한다. 무엇보다 일상의 속도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빨라졌다. <생각의 역사>의 저자 피터 왓슨은 지난 5만년의 인류사를 49,900년과 100년으로 양분한다. 49,900년과 맞장 뜨는 100년은 다시 확연하게 구분된다. 전반기는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고통스러웠지만 후반기는 그를 보상하듯 유례없는 성장으로 물질적 풍요를 일구며 인류사의 낭만시대를 구가했다.

그 후광을 업고 새로운 천년, 21세기가 시작됐지만 두 디케이드(10)가 지나기도 전에 참담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과학과 지식은 초고속으로 발전하는데 지성은 쇠퇴해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부딪고 폭력이 난무한다. 무엇보다 압축된 시간은 그에 비례해 불평등을 낳고 있어 상대적 빈곤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그러니 석학들의 진단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인류가 20세기 전반기 두 차례의 파시즘과의 세계대전 및 후반기 공산주의와 경쟁에서 승리하자 인류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의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던 프란시스 후쿠야먀 교수는 21세기 들어 최근 20년 지구촌 유권자들을 자극한 것은 불평등 심화에 따른 분노의 정치’”라며 포퓰리즘의 발호에 경계음을 던졌다.

하지만 실체적 역사는 인류의 미래에 강한 믿음을 주고 있다. 인류 문명의 궤적은 개인의 권리 증진이 상향곡선을 그려왔음을 웅변한다. 특히 계급사회가 붕괴된 중세 이래 인간의 존엄성을 기초로 하는 자유, 평등, 집회와 결사, 언론과 출판 등 기본권이 급신장을 기했다. 인간의 기본권은 급기야 칸트의 코스모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장벽을 뛰어넘고, ‘사회적 최소수혜자에 대한 집중적인 재분배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현대 정치철학의 거장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수렴되고 있다.

 

풍요 속의 허기사회한국

 

한 해를 마감하는 정회는 존 롤스를 따라 우리 사회에 정의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가라는 사유와 성찰로 이어진다. 올해 한국의 경제는 소위 선진국의 기준이라는 1인당 GNI(국민총소득) 3만 달러를 돌파했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국가를 기준으로 하면 ‘30-50클럽7번째로 진입한 대단한 업적이다. 그렇지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이면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국가는 부유하지만 숱한 개인이 가난한 세계 최고의 불평등 사회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는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우리사회가 개선해야 할 최우선적인 과제를 시사한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로저 굴드는 비만환자들을 접하면서 인간에게는 몸 속 위장이 아닌 유령위장이 따로 있다고 분석했다. 작가 주창윤은 이를 밥그릇의 허기라고 이름 짓고 우리사회를 허기사회로 규정한다. 그 허기의 원인은 말할 것 없이 탐욕이다. 모든 체제는 원칙의 과잉으로 무너진다고 설파한 2,500년 전 플라톤을 빌자면 지나친 탐욕이 우리사회의 건강한 체질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탐욕의 근저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랑의 결핍증을 치유할 묘약이 없을까? 최우선적으로 공동체적 노력을 통한 제도적 보완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우리사회 각 구성원들에게 만연한 유령위장을 치유할 정신문화가 선결전제로 다가온다. 그 정신문화를 전북의 오랜 공동체 정신에서 찾아본다. 바로 세덤이다.

근대까지만 해도 한민족의 특질은 탐욕이 아니라 오히려 나눔이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그 미덕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미했다. <25>의 작가 게오르규 또한 <한국찬가>를 통해 내 마음의 왕자들이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한민족은 고통이 무엇인지, 불행이 무엇인지, 굶주림의 갈증을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잃어버린 영혼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라는 것이다. 그 결정체가 전북의 전통문화 세덤이다.

 

사랑의 묘약 세덤

 

만성빈곤의 시절 전주의 여염집에선 가족들의 끼니를 지을 때 별도로 세 그릇의 밥을 더해 배고픈 행인들에게 대접했다. 그 인정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전국을 떠돌며 모진 풍파를 겪는 보부상들조차 장삿길에서 사람을 만나 본향을 물어 전주라는 대답을 들으면 고개 숙여 전주인심 난망(難忘)하오이다라며 세 번이나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그 인정의 현대판이 바로 해마다 세밑이면 나타나는 전주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로 재현돼 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잿빛 구름으로 덮여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렇다고 그 구름이 새해의 희망을 가릴 수는 없다. 보들레르를 나직이 읊조려본다.

“() 닻을 올리자!/ ()/ ‘지옥이건 천국이건 아무려면 어떠랴? 심연 깊숙이/ ‘미지의 바닥에 잠기리라,/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여행에서

항해를 준비 중인 새해의 소망을 세덤의 돛에 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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