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단상(斷想)
만추(晩秋) 단상(斷想)
  • 전주일보
  • 승인 2019.11.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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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칼럼
이 현 재/논설위원
이 현 재/논설위원

이젠 비워야 할 때. 대지는 이미 맨 몸으로 누웠다. 단풍나무 가지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잎새마저 떨어지면 자연은 공()으로 돌아간다.

지난 봄, 만물은 꽃향기에 취했다. 여름은 모든 기운을 밖으로 뿜어내 녹음으로 울창했다. 우주의 그 에너지로 이 가을엔 열매를 맺어 풍성한 수확을 안겼다. 시간이 흐른다. 소임을 다 한 자연은 그저 저물어 간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자연은 때를 알아 아름답다.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

지난봄도 낙화로 인해 아름다웠다. 꽃잎은 자신을 떨궈 생명을 잉태했다. 그래서 낙화는 소멸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사람도 돌아갈 때를 아는 이가 아름답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이형기 낙화

이 가을의 자연도 봄과 진배없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단풍으로 아름답게 불타고 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단풍드는 날

기실 단풍의 생물학적인 작용은 생명 보존을 위한 것이다. 섭씨 10도가 되면 나무는 물의 공급량을 줄인다. 그리고 잎줄기에 떨켜를 생성시켜 잎으로 가는 수분을 차단한다. 겨울에 잎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로 이파리를 말려 떨어뜨리는 것이다.

수분 공급이 차단되면 광합성작용을 멈춘다. 그리고 엽록소가 사라지고 안토시아닌의 빨간색과 카로틴의 노란색 등 기존의 초록색과 다른 색들이 나타난다. 단풍은 생존을 위한 나무들의 아우성인 셈이다.

그러나 오색찬란한 단풍을 나무들의 단순한 생존전략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삭막하다. 시인의 눈에 그것은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발로다.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쌍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이원규 단풍의 이유

-때를 거스르는 인간의 비극

단풍이 진다. 거리에도, 산에도, 오색 엽우(葉雨)가 흩날린다. 낙엽 구르는 소리는 만추의 송가이다. 나무들은 곧 빈 몸으로 설 것이다.

단풍이 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중년의 성장(盛粧)이라면 나목(裸木)은 노년의 참모습이다. 온갖 색으로 부풀었던 형상이 단순한 선으로 화한 나목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유교의 진성공부, 불교의 참선이 따로 없다.

나목은 잠자는 듯하지만, 내면에선 부단한 활동을 계속한다. 나무의 둥치는 오히려 겨울에 굵어진다. 사람 또한 노년의 정적과 사유 속에 내면을 채우는 정중동으로 라는 소우주를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철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인간사는 종종 엄동(嚴冬)의 비극을 자아낸다. 성찰하고 침잠해야 할 때 꽃과 잎을 피우려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1987년 겨울이 그랬다. 6·10항쟁으로 식목한 민주화의 묘목을 조심스레 가꿔 봄날을 기약하려 하지 않고 섣불리 과실을 취하려는 진보진영의 분열이 묘목의 고사를 부르는 한파를 일으켰다.

매서운 그 한파에 민중들은 울었다. 19871217일 민주정권 수립의 꿈을 안고 실시된 대통령 선거는 축제가 돼야 마땅했지만 비극으로 끝났다. 전주의 개표장인 옛 전매청사 앞 중앙시장 한 귀퉁이에서 모닥불로 추위를 녹이며 개표 상황을 지켜보던 청년들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 건 무효야라고 연신 외쳐대는 울음들이 공허한 메아리가 돼 겨울 밤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더 이상 패배를 지켜보지 못하고 개표장을 빠져 나온 한 야당 참관인은 그 모습을 보고 한 사람은 5광 패를 들고, 또 한 사람은 쌍피 석장 패를 들고 둘 다 피박에 광박을 맞았다고 참담해 하며 인근 소줏집을 향했다.

-봄을 가꿔야 할 불출마 선언

이 가을, 또 이 겨울은 다를까? 몇 사람의 국회의원이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이철희·표창원 의원으로부터 시작된 일부 여야 국회의원들의 불출마 선언이 우리 정치 현실에 대한 성찰과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버리고 비우는 그 모습에서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단풍을 보게 된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현직에서 물러난 국회의원에게 남는 것은 국회도서관 출입증뿐이라는 존재의 소멸을 감수하며 결행한 불출마 선언들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정치판은 여전히 이전투구의 이지러진 모습이다. 불출마 선언들이 자신들의 정파에 어떤 이해로 작용할까를 계산하기 급급할 뿐 을 바로 잡으려는 진정한 반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 와중에 21대 총선시계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

나목으로 선 불출마 선언들이 겨울의 봄을 만들까, 내년 4월 총선이 봄의 겨울이 될 것인가?

때가 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들은 모두 떠난다. 어떻게 떠나는 가만 남아 있다. 만장도 없이 들 것에 실려, 사리수습도 하지 않고 떠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평범한 우리들이 실천하기란 벅찬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가르침만은 경청해야 할 일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 단 한 번의 기회. 지금이 바로 그 때다.’ ‘하나가 필요하면 하나만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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