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화기와 돋보기
손전화기와 돋보기
  • 김규원
  • 승인 2019.11.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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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문 광 섭 /수필가
문 광 섭 /수필가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평소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손전화기의 벨이 울어서 잠을 깬 게 아니라 그냥 눈을 떴기 때문에 얼른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를 넘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문학기행 출발시간이 730분이어서다. 항상 6시면 손전화기 알람으로 깨었는데, 오늘은 울리지 않았다. 손전화기를 급히 열어보았더니 화면이 까맣다. 남은 시간은 25, 약속장소로 가는 데까지는 가능한 시간이다. 하지만, 컴퓨터에서 문학기행 일정표를 출력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어젯밤 출력하려다 아내가 곤히 자는데 프린터기 소리에 방해될까 봐 아침으로 미룬 게 화근이었다. 급히 돋보기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들리는 사무실에 놓고 온 것이다. 급히 컴퓨터를 열었으나 자판을 읽을 수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남은 시간 15, 허탈했다.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이다.’는 말이 떠올랐다. 또한 이 모든 것도 하느님의 섭리라는 생각에 머물자 이내 평온해 졌다. 빨리 약속장소로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겨우 눈곱만 떼고 서둘러 경기장으로 차를 몰았다. 아침 출근시간대라 차가 막혔다. 약속시간을 넘기고 있으나 전화기가 먹통이라 연락할 수도 없고, 가슴만 답답하니 한숨만 나왔다. 가까스로 10여 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더니만 J교수가 전화가 안 돼 크게 걱정했다며 반겼다. 나는 글감 하나 생겼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제목은 손전화기와 돋보기라며 가을 문학기행 작품 대신으로 써야겠다면서 미안함을 대신했다.

손전화기가 우리 삶의 동반자로 자리 한지도 20여 년이 넘었다. 나는 가끔 전화기를 놓고 나가는 바람에 불편을 겪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번 일처럼 당황하고 절실하게 느껴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어제 오전에 전화기를 켜니 충전하라는 문자와 번개 문양이 떠서 충전기를 꽂았는데 밤에 보니 완전히 전원이 꺼져 있었다. 연결을 잘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꽂고서 잠을 잤는데, 충전이 전혀 안 된 것이었다. 관광버스에 설치된 충전기로 연결해봤더니 충전중이라는 표시가 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집에서 사용 중인 충전기에 이상이 생긴 것을 몰라서 자초한 불상사였다.

우리 집엔 가정용 전화가 있으나 전화번호가 모두 손전화기에 입력되어 있으니 걸 수도 없었다. 옛날엔 조그만 수첩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가지고 다녔었다. 지금도 중요한 연락처는 메모해 휴대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또 하나, 나는 좌우 시력에 차이가 있는 난시로 일찍이 안경을 썼다. 40대에 이르러서는 돋보기를 쓰기 시작했다. 더구나 심장수술 뒤로는 돋보기 도수가 최상으로 바뀌었다. 건강을 회복하면서부턴 심한 원시 탓으로 코앞의 것은 돋보기가 아니면 구별을 못해 굉장히 불편할 때가 많다. 이번 일처럼 돋보기가 없으니 컴퓨터도 무용지물이었다. 나보다도 시력이 더 나쁜 사람들도 많고, 시각 장애자들까지 생각한다면 행복이 넘치는 소리리라.

이번 일의 발단은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떠나고 발인한 날 오후에 일어났다. 허전하고 울적한 기분을 술로 달래면서 문우들과 저녁까지 먹었는데, 평소보다 과음 했었다. 자연히 다음 날 작취미성(昨醉未醒)으로 충전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조차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새벽녘에 한 번 깨는 일조차도 없었으니 도둑맞을 땐 개도 안 짓는다.’는 속담처럼 일이 꼬이려고 모든 게 엇박자가 난 탓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분수를 지키지 못한 연유에서 비롯된 도미노 현상이었다. 친구 K는 항상 나에게 사람 죽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애절하고 그러냐. 삶을 완성하는 게 죽음이야. 그냥 대충 넘어가!’ 하는데, 나는 그렇게 간단히 넘기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아마 심성이 여리어서 그러리라.

세상사 과유불급(過猶不及)이면 패가망신(敗家亡身)이라 했던가. 친구 말처럼 애절함도 적당히 할 것이며, 술도 적당히 마셨으면 돋보기를 놓고 오는 일도 없었을 테고, 충전기 고장도 사전에 알아 전화기 불통으로 겪는 일도 생기지 않았으리라. 오늘날, 손전화기에서 모든 일상이 이루어지는 편리성도 좋지만, 여기에 모든 걸 의존하며 생활하는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생각 할 때가 많다. 나이 탓인지 몰라도 아날로그 시대가 그리울 때가 있다. 특히나 인간관계 일수록 더욱 그렇다. 마주 보고 피부로 느끼며, 눈빛으로 말하고 소리로 이해하는 감성을 통하여 사람의 향기를 더욱 더 느낄 수 있지 않던가!

나의 우둔한 실수로 비롯된 일이지만, ‘문학기행 일정표가 없어도 모든 게 잘 이루어진 것은 회원들의 이해와 협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출발 때 인사를 통해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더니, ‘나이 먹으면 다 그런다.’고 위로해 주었다.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아직 팔십도 안 된 터에 깜박 거리는 일을 하루면 한 두 차례 꼭 겪으니 그러려니 할 수만은 없다. 더구나 인간 백세시대라고 운운하는데 요양병원에 누워 생명만 부지한 체 세월 보내는 사람이 날로 늘어가는 현실에선 비애를 느낀다.

손전화기가 의사를 신속히 전달하는 통신수단으로, 돋보기가 문물(文物)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문명의 이기(利器)인 것은 분명하다. 손전화기와 돋보기를 평소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오다가 오늘 그 중요성을 크게 깨닫는 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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