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등용 지음)을 읽고
등소평(등용 지음)을 읽고
  • 김주형
  • 승인 2019.10.0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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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성과는 경제상황의 개선을 통해 평가
국가는 이념이 아닌 민생으로 말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 가장 큰 무역 규모와 외환보유고. 중국은 경제력과 국방력에서 미국을 쫓는 두 번째 국가가 됐다. 냉전 종식 이후 오랜 기간 미국 1강의 초일류 패권 시기를 넘어 이제 자연스럽게 미국 패권의 종말과 중국 패권의 시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89년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만 명에게 군대와 전차를 동원했고, 수백 명이 죽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지만 중국의 통치 체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홍콩에서 중국에 범죄인을 인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을 두고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며, 민주화 앞에 위태롭게 선 중국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성공과 민주적 진통을 앓고 있는 중국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49년 건국 이후 사회주의 열병을 앓으며, 한 때 병든 거인이라고까지 불린 중국이 어떻게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일까?

1949년 중국 공산당은 국공 내전을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승전의 주역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모택동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경제적 부흥을 위해 대약진 운동을 전개했지만, 그 기간에 45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모택동은 유소기를 후계자로 삼아 주석에서 내려왔다.

유소기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모택동과 달리 시장경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모택동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유소기와 마찰했고, 결국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표면에 내세우며 자본주의, 봉건주의, 관료주의를 제거하자며 대중을 선동했다. 결국 모택동은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중국은 10년 동안 극도의 혼란으로 뒷걸음질 쳐야만 했다.

문화대혁명 뒤 모택동, 주은래의 죽음과 함께 1978년 집권한 등소평은 사회주의체제 존속을 위해, 인민의 삶의 질 개선이 필수적이라는 인식하에, 경제적 효율성 개선을 위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다. 정치체제는 그대로 둔 채 경제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며 ‘흑묘백묘’란 말을 남겼다. 개혁개방 이후 30년간 평균 10%가 넘는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중국은 모택동의 인기와 권위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중국은 등소평에 의한 것이다. 

이 책은 대약진 운동 이후 유소기와 함께 정권의 2인자가 되었지만, 등소평이 실권한 문화대혁명부터 재집권까지 10년간의 일을 등소평의 딸인 등용이 기록한 것이다.

1904년생인 등소평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여하고 모택동의 심복이 되었다. 1957년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가 되어 당내 서열 2위가 되었고, 대약진 운동 실패 후, 등소평은 유소기와 함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966년 등소평의 나이 62세 때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다.

 ‘문혁’을 지나며 유소기는 구타와 고문을 당했으며 치료를 받지 못한 채 1969년 사망했다. 등소평은 유소기와 함께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주자파의 2인자가 되었다. 등소평은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년간 가택 연금되었고, 1969년부터 1973년까지 3년간 강서성의 트랙터 수리공장에서 줄칼을 잡고 일해야만 했으며, 아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뛰어내려 평생의 장애를 갖게 되었다.

1973년 등소평은 주은래의 추천으로 국무원 부총리가 되어 복권됐다. 모택동은 등소평이 유소기와 달리 자신의 사상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등소평은  문혁 극복을 위해 외교와 경제 전반에 나섰지만, 주은래 사후 1976년 1차 천안문 사태의 배후로 지목되어 다시 실각됐다. 이후, 모택동의 죽음과 함께 국정에 복귀했고, 1978년 74세의 나이로 온전한 중국의 통치자가 되어 20년간 중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등소평은 문혁 10년간 하방하며 ‘사회주의를 건설한 지 이미 20년이 넘었는데 노동자의 가정이 라디오 한대 조차도 살 수 없다’는 현실에 개탄했다. 그는 정치 성과는 경제 상황의 개선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며, ‘한 지방, 한 단위의 생산이 아주 나쁜데 혁명을 대단히 잘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허튼소리라는 것’이란 말로 자신의 통치 이념을 밝혔다.

등소평은 62세에 문화대혁명, 72세에 1차 천안문 사태로 쫓겨났지만, 2번의 위기를 넘기고 결국엔 지금의 중국을 만들어냈다. 극한 이념과 권력욕에 뒤섞여 침체의 늪에 빠진 중국을 건져냈다. 다만, 중국 민주화를 열망한 1989년 천안문의 중국 민중을 잔인하게 총칼로 진압한 것은 그의 과오이자 현대 중국의 모순으로 남았다.

작지만 큰 등소평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국가란 이념이 아닌 민생으로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인생이란 60이 넘어도 위기가 오며 이를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최영호 법무법인 모악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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