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
깊어가는 가을에…
  • 이옥수
  • 승인 2008.10.13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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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푸른 하늘 아래 산들이 저마다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싱그런 바람결에 지난 여름 흘린 땀이 터질 듯 익어가고 여기저기에서 후두 둑 후두 둑 알밤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기만 하다. 귀뚜리의 노래 소리에 맞춰 고추잠자리 떼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옷깃을 세우고 낙엽 지는 벤치에 앉아 있으면 그가 바로 시인이요,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면 그가 바로 철학자인 것이지요. 가을에는 생각도 많아지는 듯합니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붓는 장대비에 천둥 번개까지 몰아치는 여름에는 그리 별난 생각이 들지 않았었지요.
 그러나 가을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살아가는 이유가 의문부호로 날아들어 몸부림치게 한다. 불혹의 세대는 여문 곡식처럼 넉넉함을 만끽하는 가을이 될 것이다. 지천명의 세대는 이런저런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겠지요. 삶을 달관한 이순의 세대는 세상을 관조하며 보름달빛 같은 마음으로 가을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구름 한 점이 눈을 흘기며 중천에 떠 있었다.
 그에게 물었지요. 세상살이가 무엇인지를…. 아무 말도 없이 그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치 산다는 것도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거라는 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이번 주말에 개암산엘 다녀왔습니다. 개암산은 신령스러운 바위라는 뜻을 가진  산이지요. 산에 들면 산의 깊이만큼 생각도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는데 삶의 뒤태를 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대개의 산들이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개암산은 홀로 우뚝 솟아있더군요. 산을 오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울금바위를 오르는 순간에는 산다는 것이 참으로 보잘것없는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까마득한 산봉우리와 낭떠러지가 초라하고 미미한 삶의 존재를 다시금 일깨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없이 소중한 것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겠지요. 가을은 이렇게 고혹한 햇살과 하늘빛으로 깊어만 가는데 우리네 삶은 그리 넉넉지 못한 듯합니다. 미국 월가에서 불어오는 혹한의 바람과 연이은 톱스타들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리 시원한 소식이 없는 현실 때문이지요. 그러다 보니 가을 들녘은 풍년인데 우리네 삶은 빈곤의 늪을 벗어나질 못하는 듯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소시민들의 마음을 채워줄 희망의 싹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리 조상님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돼지를 잡아놓고 한마당 큰잔치를 벌이곤 했습니다. 풍년을 이루게 해준 하늘과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고 자축하는 자리였지요. 곳곳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풍물소리 드높은 가운데 동네사람 모두가 신명나게 어깨춤을 추며 하나로 어우러지는 참으로 정겨운 모습들이었지요.
 이러한 동네잔치는 달이 동산 위로 얼굴을 내밀고 그 달이 술에 취해 불그레해질 때까지 늦도록 이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이러한 동네잔치를 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계절은 분명 더없이 풍요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우리네 마음이 그다지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을을 가을답게 보내려면 넉넉한 마음이 필요한 법이지요. 이러한 여유로운 마음은 그냥 되는 일은 아닙니다. 세상살이가 가을다워지려면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보다 많은 어르신들이 자신보다는 소시민들을 위해 정말 섬김의 몸짓을 보여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가을이 가을답기를 소망해 봅니다. 깊어가는 가을을 보내는 소시민의 욕심 없는 꿈이자 소박한 바람이 아닐까 합니다. 부안=이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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