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 알
사과 한 알
  • 김규원
  • 승인 2019.08.2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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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김 고 운 /수필가
김 고 운 /수필가

하늘이 맑아지는 추석 무렵 과수원에 가면, 타오르듯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들을 만난다. 비바람을 견디고 무더위에 살이 붙은 사과는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가 되면, 여름 내내 저장해 둔 태양의 열정을 찾아내어 제 몸을 치장하기 시작한다.

작열하는 여름의 햇볕과 긴 기다림이 녹아, 사과의 겉에는 붉음을, 내밀한 살 속에는 달콤함과 향기로움을 배합해 낸다. 한 알의 사과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비료 · 병충해 방제 · 햇빛 · 온도 · 바람 · 농부의 정성 등 수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햇볕과 바람과 적절한 기온 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과농장의 봄은 12월에 이미 시작된다. 불필요하게 자란 가지들을 잘라 수형을 잡아주어야 하고, 봄에 사과가 열릴 꽃눈 자리를 염두에 두고, 웃자란 가지와 방해될 가지를 잘라내는 가지치기 작업을 한다. 가지치기에서 잘려나가지 않고 선택되어야 꽃을 피울 수 있다. 4월 말쯤부터 사과 꽃이 만발하면, 열매가 튼실하게 열릴 가능성이 높은 꽃을 남기고 모두 따내는, 꽃따기 작업을 한다. 나무에 핀 꽃의 90%가 탈락하는 2차 선택이다. 벌들의 선택을 받아 사과 열매가 열려 작은 밤톨만큼 자라면, 5개의 열매 가운데 가장 좋은 한 개만 남기고 4개를 따낸다. 이때, 농부가 사과를 크게 키우고자 한다면, 더 많은 사과를 따내야 한다. 이 작업에서 대부분의 작은 사과들이 도태되는데 이 3차 선택작업을 열매 따기(摘果)라고 한다. 열매 따기 이후에도 농부는 수시로 사과밭을 돌아다니며, 위치가 나쁜 것이나 발육상태가 나쁜 사과를 따낸다. 한 알의 사과가 되기까지 선택은 또 남아있다. 사과에 햇볕이 잘 들도록 햇볕을 가리는 잎을 따내는 잎 따기 작업을 하며, 부실한 사과를 또 한 번 솎아낸다.

어렵게 살아남은 사과에 고비는 또 남아있다. 자연의 선택을 거쳐야 한다. 태풍이나 때아닌 우박이 있고, 사과의 당도가 높아지면서 까치 등 조류와 벌 등 곤충의 피해를 보기도 한다. 물론 각종 병해에 따른 얼룩이나 상처를 입지 않아야 한다. 그 뒤, 마지막 선택은 사과 선별기에서 상처나 기형 때문에 등외품으로 판정되지 않아야 비로소 상품으로 포장되어 식탁에 오를 수 있다.

 

최근 수입 과일에 밀려 최대 소비 과일의 위치를 잃은 게 사과지만, 생산량이 많아 값이 싸고,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어 멋을 생각하는 여인들에게 인기다. 사과에는 식이섬유가 많아 배변을 쉽게 하고, 노폐물을 배출하며, 포도당 · 과당 · 사과산 · 주석산을 함유하고 있다. 사과는 아침에 껍질째 먹어야 좋다고 한다. 사과껍질에는 항산화 작용이 뛰어난 퀼세틴이라는 물질이 들어있어, 항균 · 항바이러스 작용이 탁월하다.

우리 식탁에 오른 사과 한 알은 작아 보일 수 있다. 그 작은 사과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듭되는 운명적인 선택을 거쳐 마지막까지 남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과로 인정받게 된다. 한 알의 사과에는 가지치기에서부터 최종 선별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시간의 퇴적(堆積)이 아닌, 살아남는 생명의 환희가 박혀 있다. 뜨겁고 자상한 태양의 은총이 거기에 살아 있고, 농부의 꿈과 희망이 녹아 달콤한 향기로 스며있다. 사과의 종류는 여름의 끝에 먹을 수 있는 산사 등 조생종부터, 추석 무렵에 익는 홍로 등 중생종, 늦가을인 11월 말에 익는 부사 등 만생종까지 여러 종류가 제 때에 맞춰 익어간다. 자연은 오묘하고 정직한 것이어서, 사과 한 알에 스며든 농부의 정성과 좋은 먹을거리를 염려하는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들인 정성만큼 좋은 사과가 생산되어, 높은 가격으로 보상받는다. 그럴 때 농부의 마음은 흐뭇하다.

나는 몇 해 전에 한 해에 약 6~70일 정도 장수군에 있는 친지의 농장에 가서 농장 일을 거들었다. 물론 다른 인부들과 같이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쉴 틈 없이 일하고 임금도 받았다. 11시간 가운데 오전과 오후에 새참 먹는 시간 30분씩, 점심시간 1시간을 제하면 꼬박 9시간이나 일을 했다. 처음에는 일 자체가 퍽 낯설고 서툴기도 했지만, 쉬지 않고 작업을 계속하는 노동의 강도(强度)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하루 120km를 자전거로 달리는 체력을 믿고 덤볐지만, 사나흘 동안은 힘겨워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여자들도 잘하는 일에 질 수 없다는 오기로 버텼다. 다행히도 적응하는 중간에 우천으로 쉬는 날이 있어 체력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 노동으로 어려운 이들의 생활을 이해하고, 자연 조화의 경이로움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을 차에 태워 오가면서, 또 함께 일하면서 사람 사는 세상의 또 다른 의미를 배우며 평생 배우지 못한 많은 것을 몸으로 겪었다. 겪어보지 않았으면 절대 알 수 없던 삶의 무게와 노동의 가치를 몸에 새겼다.

사과 한 알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그 숱한 선택의 과정과 행운이 거듭되어야 하듯 인생도 그처럼 대단한 행운과 노력이 있어야 좋은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흔한 사과 한 알에도, 농부의 정성과 깊은 고뇌가 깃들어 있고, 햇빛과 바람과 벌들의 꽃가루받이까지 자연의 도움이 조화롭게 스며있음을 새롭게 느꼈다.

한 알의 사과가 익어 가는 과정에서 사람이 자연을 멋대로 조절하거나 변화하게 하는 짓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배웠다. 인간은 자연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닌 자연에 포함된 개체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진리가 사과 한 알에 숨어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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