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까치풀꽃
봄까치풀꽃
  • 전주일보
  • 승인 2019.07.1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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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문 광 섭 /수필가
문 광 섭 /수필가

봄이 지쳐 널브러진 전주천 산책로에 방긋거리며 인사를 건네는 해당화의 상기된 얼굴이 새색시처럼 곱기만 하다. 푸른 잎 가운데서 뾰족이 내민 짙은 연분홍 입술에 현혹되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왔다. 겨우내 숨죽이며 살아온 날들에 묻혀 있던 한숨이 일시에 토해진다. 막혔던 물꼬가 뚫리어 이랑으로 줄달음치듯 가슴 옹이에 사무치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피어났다.

작년 이맘때 부산에 사는 한 살 위 누나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막내 조카가 누구지?” 하니까 전주 삼촌이라고 어렵사리 입술을 움직이며 날 알아보았다. 그러곤 열흘 뒤 홀연히 떠났다.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더니 그렇게 허망하게 흙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에 피었다 진 해당화가 무더위도 견디고 북풍한설도 이겨내고서 또 이렇게 성숙한 차림으로 나를 반기고 있다. 누나도 꽃처럼 다시 피어나 날 다시 볼 수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를 무척이나 생각해주던 누나다.

 

그리움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두 번째로 나를 반긴 것은 겹 황매화였다. 토실토실한 매화는 마치 어린아이가 방긋거리며 주먹을 입에 넣는 모습같이 귀엽기만 하다. 뒤쪽에서도 부르는 듯해 돌아보니 꽃잎이 작은 불두화가 옹기종기 모여서 찬불가를 부르고 있다. 개나리, 벚꽃 등에 밀려 숨죽이고 살다가 이제 기지개를 켜고서 막 세수하고 나온 것처럼 뽀얀 얼굴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자 여기도 좀 봐주세요.’라는 듯해 시선을 옮겼더니, 어쩌면 그렇게도 코스모스를 닮았을까 싶은 노란 꽃이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 앙증스럽게 생긴 이 꽃은 괭이밥이었다. 다른 봄꽃을 찾아 돌아서려는데, 내 눈길이 운동화 코빼기 끝에 머물면서 그만 멈추고 말았다. 길섶에 파란 구슬 같은 꽃들이 널려 피어있었다. 허리를 굽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 크기가 1cm 가 채 안 되고 네 잎으로 하늘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아주 작은 꽃이었다. 작지만, 흰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중년 여인처럼 고상한 기품이 엿보였다. 볼수록 의젓한 맵시에 잠시 매료되어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무슨 꽃인지 궁금하여 스마트 폰에 담아 식물도감을 만든 친구 ㅈ에게 전송해 물었다. 원래는 개불알을 닮아서 개불알풀인데 우리말 이름으론 봄까치풀이란다. 봄소식을 알리는 까치를 연상해 지었으며, 꽃말도 기쁜 소식이라고 알려주었다. 2년생 초본과로 키가 크고 꽃이 큰 것은 큰 개불알풀 꽃인데, 꽃이 크지 않고 키도 작은 걸로 보아 개불알풀의 변종이지 싶다고 부연했다. 지나간 10여 년 동안 이 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교훈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광경에만 감동하고 찬사를 보낼 뿐, 그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 하나의 요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꽃구경할 때도 무리 지어 늘어선 벚꽃 터널이나 복숭아꽃이 만발한 도원을 만나면 탄성을 지르며 푹 빠져들었다. 한 송이 꽃을 피워낸 아름다움이나 생태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오직 꽃 무리에만 정신을 팔았다. 조그만 벌레, 풀꽃 정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늘 처음 본 봄까치풀 꽃도 그동안의 습관에 따라 눈 밖에 있었기에 알지 못했다.

 

숲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숲속의 나무도 함께 바라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함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동안, 나의 편협한 사고(思考)로 큰 그림만 생각했지 큰 그림을 구성하는 주변의 요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꽃으로 치면 해당화나 매화 같은 꽃에만 눈길을 주었지 봄까치풀 꽃이나 그 밖의 풀꽃 등은 외면했던 게 사실이다. 지난날의 삶 자체가 밖으로만 돌면서 너무 외형적이고 인간관계의 친교에만 치중해온 탓이리라.

나이 칠십을 넘겨서야 화분에 홀씨가 날아와 꽃을 피웠던 사랑초에 한동안 폭 빠져든 적이 있었다. 이후로 아주 작은 풀꽃 하나에도 관심을 두어 깊이 관찰해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작고 하찮은 것에 마음을 쓰는 삶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마음의 눈을 열게 해주었다. 세상에는 하찮은 것이 없고 모든 생은 큰 의미를 지니고 세상의 한 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런 작은 것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지난 내 삶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소홀히 했던 점을 후회한다. 나이 들면서 내 몸이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아픈 경우를 당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무심한 불효였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어머님이 생시에 무릎 때문에 고생하셨으니 어머니, 얼마나 힘드세요?’라든지, 또는 오늘 혼자 집에 계시느라 심심하셨죠!’라는 위로의 말을 드리지 못한 게 통한으로 남아 있다. 그 쉬운 말 한마디조차 할 줄 몰랐으니 불효가 막심했던 셈이다. 이 나이가 되어 작은 것들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비로소 내가 큰 것을 놓치고 있었음을 알았으니 나는 너무 둔하고 답답한 사람이 아닌가.

 

세상에는 크고 화사한 아름다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대지가 얼어붙고 모두가 움츠리는 시기부터 양지쪽에 다소곳이 피어나는 꽃, 어울리지 않는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에서 예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듯이 고운 이름을 가진 봄까치풀꽃이다. 화려하지 않으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수수하면서도 블루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꽃, 작아서 더 귀엽고 앙증맞은 꽃 덕분에 인생의 새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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