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5·18
기억하는 5·18
  • 전주일보
  • 승인 2019.03.0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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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업은 이만하고 모두들 스쿨버스를 타고 귀가하기 바란다. 스쿨버스를 이용하지 않는 친구들도 오늘은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며칠 전 운동장에 대형 군용텐트가 들어서고 총을 든 군인들이 교문을 지키더니 수업마저 중단됐다. 공부에서 해방된다는 기분도 잠시 시내 곳곳에 들어선 장갑차와 군용트럭, 그리고 수건하나 두르고 막대기와 파이프를 들고 버스를 탄 동네 형들. 
 
뭔지 몰라도 세상이 잘못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갑자기 다가온 80년 5월이 평생 아픔으로 남을 줄은 몰랐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와 주십시오. 지금 대한민국 군인이 지켜야 할 국민에게 오히려 총을 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련복 차림의 목이 쉰 외침을 처음부터 믿지는 않았다. 걸어서 20분 거리인 도청 앞 분수대 근처에는 무서워 가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막대기 대신 총을 든 형들이 많아졌고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져 갔다. 자동차 경적 대신 '탕탕' 총소리가 더 흔해지고 보일 듯 말 듯 헬리콥터는 높은 하늘만 날아다닌다.

시민군들의 마지막 저항지 중 한 곳인 사직공원 아래 집에서 밤새 총소리로 마음 졸여야 했던 그날 아침. 방송에서 그들은 "폭도를 진압했다"고 자랑했고 도청 앞 상무관에 줄지어 들어선 관들 사이사이에서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 새벽 "광주시민 여러분 도와주십시오"를 외치던 그 누나는 어디로 갔을까? 총을 들고 시내를 돌던 그 형들은 어디에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의롭게 세상을 떠난 형들은 상무관에 누웠고 벌건 상처보다 더 벌겋게 울부짖던 형들은 상무대로 끌려갔다. 함께 하지 못한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그 순간 숭고한 뜻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광주는 '커다란 도시 장례식장'이었다. 믿었던 군인들에게 총 맞아 숨진 기막힌 현실도 그렇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막막한 가난한 유가족들. 광주는 위로의 말을 쉽게 건네지 않았지만 위로했고 또 위로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도 돌보지 못한 채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다 군인들 총에 쓰러져가고 군화 발에 짓밟혀 제대로 걷지 조차 못한 형들이 북한 특수군이란다. 터무니없는 지만원의 주장은 그렇다하더라도 알만큼 알 것 같은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를 비롯한 한국당 의원들의 행태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5·18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사람을 처벌하게 한다는 내용의 법안추진에 반대하고 5·18망언 3명의 징계안도 '나몰라'하는 식이니 말이다. 

일제 강점기 36년에 사과 한마디 않던 사람들이 "日王이 사과해야 한다"는 문희상 국회의장 말에 "경고 한다"고 나서는 일본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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