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회담과 '서희 담판'
북미회담과 '서희 담판'
  • 전주일보
  • 승인 2019.03.0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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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요나라)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고려 조정에 항복을 요구했다. 당시 중군사 자격으로 참전한 서희는 소손녕과 협상을 벌인다. 그 유명한 '서희 담판'이다.

협상은 서희와 소손녕의 기 싸움으로 시작됐다. 소손녕은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다.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당연한 예법이다.

그러나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며 거절했다. 두 세 차례 실강이를 거듭하다 화가 난 서희는 숙소로 돌아가 나오질 않았다. 서희의 당당한 모습에 당황한 소손녕은 결국 서로 맞절을 하고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서희와 소손녕의 팽팽한 기싸움은 협상테이블에서도 계속됐다.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영토 대부분이 우리 영역 안에 있으니 고구려 옛 영토는 우리 땅이다.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어찌 바다 건너 송과 더 가깝게 지내는 것인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높이 모시도록 하라"고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서희는 "말도 안된다.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고려라 지었다. 수도가 서경(평양)인 것도 고구려를 이으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거란의 동경도 우리 땅이다"고 맞받아쳤다. 사실 고려의 수도는 개경(개성)이었으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을 언급한 것이다.

서희는 이에 덧붙여 "거란과 고려가 친밀하지 못한 것은 여진이 압록강 부근을 가로막고 있어서다. 당신들이 여진을 쫓아낸다면 서로 왕래를 하며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서희의 논리정연한 답변에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던 소손녕은 이를 자신의 왕에게 보고했고, 결국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고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서희가 칼보다 무서운 혀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담판으로 얻어낸 바로 그 '강동 6주다'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는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에 성을 쌓아 실리를 챙겼다. 서희가 발휘한 외교적 수완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화해를 이끌어낸 외교협상의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천년도 더 전에 있었던 '서희 담판'을 지금 꺼낸 것은 '하노이 선언'이 무산된 2차 북미회담이 '오버랩' 돼서다. "훌륭한 결과를 확신한다", "성공적 회담을 믿는다"는 양 정상의 발언을 굳게 믿었던 터라 회담 결렬의 파장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남북 경협 등을 준비하며 북미회담 결과를 주시해온 우리 정부로서도 당혹감과 함께 큰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을 게다.

국내외 정세가 시끄럽다. 말 한마디로 전쟁을 끝내고 실리까지 챙긴 우리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외교관, 서희의 지혜가 절실하게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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