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보호법은 '고무줄'
문화재보호법은 '고무줄'
  • 신영배
  • 승인 2018.07.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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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배

가히 살인적 더위다. 이런 더위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사실로 다가왔다. 꺾이지 않는 고기압 세력을 체감하며 줄포면 주민들의 숱한 반대와 문화재 지정해제 요구에도 문화재청이 앞장서 특정가문의 한 인물이 태어난 허술한 초가집을 비호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더위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지 벌써 수일 째다.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는 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규모의 저택이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1861년 안채가 건립되고 1903년까지 4차례의 증축으로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이 고택은 9채의 기와집이 오밀조밀 조화를 이루어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준다.

이 집에서 1891년 10월1일(양력) 인촌 김성수가, 1896년 10월1일에는 삼양사를 설립한 수당 김연수가 작은 안채에서 태어났다. 삼정승이 배출될 수 있다는 명당으로 그 터에서 태어난 인촌 김성수가 초대 부통령을 지냈고 후손인 김상협은 전두환 군사정권 때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 터를 뿌리로 삼양사 그룹이 만들어졌고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가 건재하고 있으니 가히 명당이라는 말이 그럴듯하다.

인촌 생가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이 가문은 ‘1907년 봄,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火賊)의 행패와 귀화(鬼火)의 출몰 때문에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양가 모두 이사하게 됨에 따라 두 분도 이곳을 떠났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를 들춰보면 고창지방을 휩쓸던 ‘화적’이라는 집단은 1905년 조선이 일본과 체결한 을사늑약에 분개해 활동했던 의병을 지칭한 것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당시 동학군이 패배한 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계속되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지역은 의병활동의 중심지였다. 의병들은 대농과 상업자본 세력이 일본과 손잡고 사업을 확장하려는 지주들과 거상들의 움직임을 증오했다. 자연스럽게 인촌 김성수 가문도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멀쩡한 고대광실(高大廣室)을 두고 당시 김성수의 양부 김기중이 인근 줄포항을 이용해 소금을 반출하는 등의 사무실로 사용했던 보잘 것 없는 초가집으로 당대 최고의 대지주 가족들이 이주를 한 것이다.

당시 이주하면서 사무소로 쓰던 초가집을 보수해 인촌의 양아버지 김기중이 거주하고 인근에 똑같은 규모의 집을 지어 인촌의 친부 김경중이 살았던 것이다. 이들이 저택을 마다하고 낡고 좁은 초가집을 보수해 주거한 이유는 의병들을 피해 숨죽이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대목이다.

복수의 줄포면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김상만 가옥의 안채와 ‘ㄱ’자 형태를 이루는 사랑채 같은 건물과 조금 떨어져 있는 창고 형태의 건물 등 3동은 김성수의 양부인 김기중 씨가 사무실 겸 창고로 쓰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때 고창에서 줄포로 이사 오면서 건물을 개축해 김성수 일가가 사용하고, 지근거리에 지금은 헐어 없어진 초가집 한 채를 지어 김연수 씨 가족이 살았다고 기억한다. 나머지 5동은 1982년경에 김상만의 4촌 형인 당시 김상협 씨가 국무총리로 임명된 후, 김상만이 살았던 초가집을 개축하면서 신축했음은 나이 지긋한 줄포 주민들은 모두 알고 있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고창군 부안면에 위치한 김성수와 김연수 생가는 1861년에 처음 지어 4번에 걸쳐 증축하면서 독특한 구조를 이루었고, 많은 인물이 나온 명당이므로 문화재의 가치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개축해 주택으로 거주했던, 한낱 피난처에 불과한 줄포의 초가집을 왜 문화재로 지정했는지 많은 의문을 갖게 된다. 창고로 쓰던 건물을 주거시설로 수리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구조로 탈바꿈했다고 문화재로 보존키로 한다면 조선말에 지어진 건물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맞다.

왜냐면 한옥은 살면서 여러 형태로 변형을 거듭해왔고 각 지역마다 필요에 따라 다른 구조가 되었기 때문에 각 건물은 나름대로 특색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감안해보면 김상만 가옥은 소유자(인촌기념회)가 이 건물을 소개하는 홍보책자에 기록한대로 ‘일민 김상만의 생가’이기 때문에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 국무총리의 권한(?)을 활용해 억지로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최근 해괴한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김상만 가옥으로부터 문화재 보호구역 내(500미터)에 고층건물을 지으려고 수없이 문화재청의 문을 두드렸지만, 손사래를 치던 문화재청이 보호구역 내에 무려 17층의 아파트를 신축하도록 승낙을 했다.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건물을 개축하거나 신축을 신청할 때마다 ‘불가’를 외치던 부안군과 문화재청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청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고무줄 법’으로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문화재청 임의로 건축규정 적용을 배제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법인지, 오는 8월3일 김상만 가옥에 대한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 개최를 앞두고 주민을 다독일 필요가 있어서 슬그머니 물러난 일인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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