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바람의 언덕'과 '지심도'를 품다
바다는 '바람의 언덕'과 '지심도'를 품다
  • 전주일보
  • 승인 2017.10.2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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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정 현 /수필가

‘싸늘한 가을바람이 속살에 은근히 파고드는 10월 끝자락이 단풍잎을 더욱 진하게 물들이며 지나가고 있다. 지난여름의 추억거리가 소슬바람에 실려와 날 깨운다. 여름 어느 날, 더운 일상을 피하여 바다로 향했다. 노쇠한 몸이 더위를 순탄하게 피해갈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비키니 수영복에 앙상한 가슴뼈를 보이며 해수욕장으로 발걸음을 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냥 바닷가로 가기만 해도 괜찮겠지 싶었다. 시원한 바람에 상쾌한 기분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해서 지심도가 있는 남녘 바다로 갔다.

성능 좋은 승용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에어컨의 도움으로 흥겨운 음악을 자장가삼아 졸기도 하고 추임새도 넣어가며 즐길 만큼 쾌적했다. 밖은 뜨거운 태양에 부대껴 시들시들한 산천초목들이 묵연히 있는데, 우리 일행은 종달새 우짖는 봄이거나 선선한 가을 기분을 느꼈다. 통영을 거쳐 거제도 남단 해금강 바람의 언덕에서 내렸다. 여름의 열기가 바닷바람에 산산이 흩어지는 듯 시원한 청량감이 들었다. 예약해둔 펜션에 짐을 내려놓고 언덕 아래 바다를 바라보았다. 무더운 날씨의 열기를 식히고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헹구는 넓고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고왔다.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고 갈매기가 끼룩거린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조는 듯 흘러갔다. 답답한 도시 아파트 공간에서 바다 풍경으로 들어오니, 염천에 시달리는 삶의 답답함과 지루함이 가셔지는 듯 마음에 생기가 돌았다.

반주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취흥에 겨워 ‘바람의 언덕’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번쩍이는 풍차아래서 도도한 기분으로 ‘산타루치아’를 허공에 띄웠고, ‘아름다운 꿈’을 길게 끌어냈으며 흘러간 옛 노래들을 구성지게 뽑았다. 술을 마신 담대함이 염치를 잊게 했던지 무례한 음성으로 주위를 어지럽혔다. 다행이 다른 일행이 없었고 우리들만의 천국이 되어 일생일대의 절창(?)을 뽐냈다. 바람의 언덕답게 끊임없이 부는 바람, 바람의 향연에 여름날의 더위를 잊은 채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마음과 마음이 모여 옛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웃음을 끌어냈다. 눈물과 한숨이 말의 틈새에 끼어 입 밖으로 나오기도 했고, 배꼽을 잡는 실수담이며 인생 여로의 항쟁기 까지도 얼핏얼핏 침방울과 함께 튀어나왔다. 모두 후편이 없는 불완전한 전편으로 열을 올리며 끝내는 이야기였다.

이튿날 우리는 장승포에서 배를 타고 지심도로 갔다. 장승포에서 배로 20분쯤 가면 닿는 섬이었다. 섬 같지 않은 섬이었고, 깎아지른 듯싶은 절벽이 사방에 둘러있어 일제강점기 때는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포진지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가 관광 코스로 개발되었다. 섬 위로 올라 주위를 한 바퀴 도는데 두 시간쯤 걸렸다. 주변 풍경은 그지없이 새롭고 기이하고 아름다웠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해수욕을 즐길 모래사장이 없는 것이 흠이었다. 끊임없이 넘실대는 파도소리를 벗 삼아 한 세월을 보낼만한 섬도 아니었다. 일부 민가도 있고, 민박집도 있긴 하지만, 물이 부족하고 채소를 심을 땅이 없음은 물론 생필품을 파는 상점도 없었다. 배를 타고 뭍에 나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며 생활해야 하는 불편한 섬이었다. 섬 일주도로는 잘 정비되어있고 나무 그늘 속으로 걷는 기분이 쏠쏠하며, 오르내리는 섬 주위 환경이 지루함을 잊게 만들었다. 아름드리 해송들이 우거져있는 한 편에, 대밭도 무성한데 군데군데 동백나무들이 팔손이나무, 후박나무 등과 어울려 자라고 있었다.

동백꽃이 필 때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이 섬은 예부터 일본 장사치들이 본토에 입국하기 전에 머물렀던 기항지였고, 폭풍우가 부는 날이면 피항지 역할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귀중한 자연 생태계를 간직한 자원의 섬이고, 관광지로서 잘 다듬어진 섬이기에 한 번쯤 다녀갈만한 가치가 있었다. 육지의 장승포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홀로 내던져진 멀고 먼 섬과 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잦을 수밖에 없겠고, 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순환배가 생길 듯하다. 남녘바다에는 섬이 많다. 제각기 독특하고 아름답고 진기한 식물자원을 품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파도가 부드럽게 여울지는 섬에 갈 때면 아늑한 생명의 시원을 보고 느낀다.

지심도에서 뭍으로 나오는 배안에서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출렁이는 파도는 잔잔한데 배의 움직임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의 여로는 남녘 바다에 아늑한 그리움을 담을만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심도와 바람의 언덕은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이기에 언젠가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삶의 어느 시절에 그립고 아련한 기시감이 드는 바다 풍경이 많다. 그러나 바다는 어느 곳이든 근원적 그리움의 대상이기에 울적하고 짜증난 일이 있으면 먼먼 수평선을 보며 마음을 풀고 싶은 대상이다. 바람의 언덕과 지심도는 그런 낭만적 풍경으로 추억을 감쌀 수 있는 요소를 많이 지닌 피서지이다. 선선한 가을에 더운 여름을 추억하는 여유가 이상하지 않다면, 내년 여름에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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