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거지악(七去之惡)
칠거지악(七去之惡)
  • 전주일보
  • 승인 2017.10.19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수필
문 광 섭 / 수필가

  추석에 찾아왔던 식구들이 떠나간 자리가 여운만이 감돌뿐 휑하다. 명절 때마다 느끼는 감회이지만, 한차례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고요하다. 다시 내차지로 돌아온 TV를 켜니 중견배우 임혁(69세)씨의 부모님 산소에서 녹화된 내용이 방영되었다. 친모가 계셨으나 아버지가 서모를 들이는 바람에 그 밑에서 성장했고, 어머니의 불우했던 삶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오랫동안 가졌었단다. 지금은 다 삭히고 받아들였다고 토로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라도 친모가 아버지 곁에 누워계시니 정말 다행이고, 이승에서 못사신 삶을 저승에서나마 누릴 수 있지 않겠냐며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로부터 박대를 받으면서도 잘 참아내셨고, 외려 자식들과 아버지 걱정만 하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과 죽음이라는 소멸이 모든 것을 용서하게 한 것이 아닐지…….

  문득, 어제 조부모님 산소를 다녀오는 내내 떠올린 할머니의 생애와 겹치면서 조선시대 후기 유교문화에서 파급된 칠거지악이 생각났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은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내칠 수 있는 일곱 가지 구실이다. 첫째가 시부모에게 순종(順從)치 않음이고, 둘째는 아들이 없음[無子]이며, 셋째는 부정(不貞)이다. 넷째 질투(嫉妬), 다섯째 나쁜 병[惡疾], 여섯째 수다스러움[口舌], 일곱째가 도둑질[竊盜]이다. 지독한 남성위주의 유교적 악습이지만 삼불거(三不去)라는 세 가지 예외 조항이 있었다. 함께 부모의 3년 상을 치렀거나, 장가들 때 가난했다가 나중에 부자가 된 경우, 아내가    쫓겨나서 의탁할 데가 없는 경우에는 내칠 수 없도록 정했다.

  칠거지악 가운데 여섯 가지는 여자의 과실에 의한 것이니 그렇다고 치자. 넷째로 꼽는 질투(嫉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남자가 바람을 피거나 소실(小室, 첩)을 들이려는데 아내가 투정을 하거나 질투를 하면, 칠거지악에 해당되어 이혼되거나 내쫓기는 구실이 된다. 남자의 우월적 권한이요, 행세다. 여자 속이 부글부글 끓고, 눈앞이 캄캄해도 참아내야 한다.

  나의 할머니가 그런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올해에 윤달(윤 5월)이 들어서 오십리 밖의 할머니 산소를 할아버지 곁으로 이장했다. 이후, 살아생전 하시던 말씀이 되살아났던 차에 방송을 시청하고, 다시 한 번 할머니의 삶을 뒤돌아본다.

할머니(1886년생)는 금산(錦山) 출신으로 나이 열일곱에 열여섯이신 할아버지와 혼인하시어 3남 1녀를 두셨다. 나의 아버지가 맏아들이다. 할머니가 아들을 둘이나 낳으신 뒤, 할아버지께서는 기생학교를 갓 나온 15세 되는 처자를 소실로 들였다. 이로부터 반백년의 세월이 지나고, 내가 숙부 댁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학년 때다. 다림질을 하시던 숙모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님, 어린 소실을 데리고 왔는데, 어떻게 안방을 내주고 뒤채로 건너가셨어요?”

“여자가 질투하면 칠거지악이다.”

그러시곤 먼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긴 담뱃대를 입에 무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할머니의 처연하고 아픈 심경이 그 말씀 한 마디에 모두 들어 있었던 느낌이 내게 와 닿았다. 남성위주의 유교적 전통에 짓눌려 시앗에게 안방을 내주고 살아온 세월의 아픔을 시대의 불행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쓰디 쓴 인고의 시간이 한 모금의 담배연기로 흐트러지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후에 9년의 세월이 흐른 1968년 봄, 국가공무원으로 발령을 받고서 찾아뵈었을 적에 내게 당부하시던 말씀이 생생하다.

“광섭아, 작은할머니 잘 모셔라! 자식도 없고 불쌍한 사람이다 …….”할머니는 당신이 견뎌낸 시간 속에서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하고 보듬는 아량과 긍휼의 마음을 얻으신 것이라 생각된다.

작은 할머니는 1970년 3월, 친 할머니보다 10년 늦게 들어오시어 10년 먼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 40년 넘게 살았으니 부러울 게 없을 듯싶지만 친할머니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결국 생을 일찍 마치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친할머니가 둘째아들과 막내아들집을 오가며 60여년을 손자들과 함께 누리신 삶과는 비교할 바 못되는 편치 않은 삶이었지 싶다.

  할머니(박 마리아)께선 묵주(黙珠)를 손에 쥔 채, 94세를 일기로 고통도 없이 편안하게 눈 감으셨다.

문광섭/수필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