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보내 온 메시지
과거에서 보내 온 메시지
  • 전주일보
  • 승인 2017.09.0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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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 / 수필가

얼마 전에 페이스 북 메신저에 “오늘은 정ㅇㅇ님의 생일입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정ㅇㅇ은 아내보다 한 해 앞서 세상을 뜬 아내의 친구다. 생전에 아내의 문병을 오기도 하고 가끔 페이스 북을 통하여 아내의 병세를 물어오며 안타까워했었다. 그런데 오래 병상에 있던 아내보다 먼저 그녀가 급성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생일이라는 메시지는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녀가 살아있던 때에는 생일축하 메시지나 영상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던 일과 그 다음해에 그녀를 따라 가뭇없이 가버린 아내의 생각까지.

죽음은 그저 소멸이라는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많은 의미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남기는 절차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바로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사람 뿐 아니라 세상 만물이 다 탄생과 함께 소멸의 길을 간다. 생물에 국한하지 않고 돌멩이나 쇳덩어리도 마찬가지로 시간 속에서 작아지거나 닳아 없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아내와 그녀의 존재는 세상에서 원래의 원소로 분해되어 뼛가루 한 주먹이 남아 작은 단지에 담겨있지만, 세상에 남긴 DNA는 아들과 딸의 몸과 손자 손녀에게 전해져 오늘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어떤 학설에서는 인간의 몸은 DNA가 머무는 숙주(宿主) 같은 것이어서 DNA의 판단에서 숙주의 존재가 필요 없게 되면, 죽음의 인자를 발동시켜 숙주를 죽게 한다고 했다.

건강에 전혀 이상이 없어보이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급성 암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은 병상에 있던 아내나 내게 큰 충격이었다. 10년 넘게 병상에 누워있던 아내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가깝던 지인을 잃었다는 상실의 아픔이 크게 다가왔던 듯하다. 어느 날 찾아온 죽음 앞에 무력하게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불치’라는 진단을 받은 아내에겐 엄청난 두려움이었다. 아내는 항상 죽음이 두렵고 그렇게 누워서라도 살아있고 싶다고 했다. 결국 그 살아있고 싶은 갈망은 시간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게 아린 그리움만 남겼다.

무변광대의 우주에 비하면 모래알만큼이나 작은 지구라는 별에서 태어난 자체가 기적이고 축복이지만, 반드시 죽음에 이르도록 설계된 DNA의 숙명은 운명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큰 아픔을 내포하고 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의 기전(機轉)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부 학자들이 DNA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짐작을 할 뿐, 전혀 밝혀진 것이 없다. 그저 심장이 박동을 멈추면 의사가 ‘사망’이라는 이름의 진단을 내릴 뿐이다.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어떤 사람은 120년이 넘도록 살고, 어떤 사람은 온갖 첨단 시설 속에서 살아도 6~70년 살다가 죽는 이치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어떤 학자는 평생 심장의 박동숫자가 정해져 있어서 그 수가 다하면 죽는다는 따위의 애매한 이론을 내놓고 있으나 그저 나름대로 그럴싸한 짐작일 따름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 죽음과 노화의 인자를 알아내려 연구하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태초에 빅뱅을 통해 숱한 별들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우리가 식별하는데 편리하도록 은하계니, 블랙홀이니, 암흑물질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어쩌다가 지구라는 작은 행성이 만들어졌다. 이 작은 행성에 물이 생기고 그 물에서 작은 생명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적어도 40억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생물이 진화하고 돌연변이를 거듭하여 오늘의 인류가 만들어졌다.

작은 미생물이나 개미들의 조직생활,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우게 하는 탁란(托卵)을 수행하는 광경은 놀랍기만 하다. 눈도 뜨지 않은 뻐꾸기 새끼가 박새나 오목눈이의 알이나 부화한 새끼를 등에 올려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일련의 동작이 모두 어미의 DNA를 통해 물려받은 행동이다.

그렇게 남의 알과 새끼를 다 없애야만 덩지 큰 뻐꾸기새끼가 박새 어미로부터 혼자 먹이를 얻어먹고 잘 자랄 수 있기에 그런 유전자가 대물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에서 막 깨어 눈도 뜨지 못한 뻐꾸기새끼는 DNA에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박새의 알과 새끼를 등에 쉽게 짊어지고 비비적거려서 기어이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본능을 시행한다. 자연의 법칙은 간단한 습성연구 따위로 풀어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인간의 생존이나 뻐꾸기의 생존 가치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자연과 우주의 순리로 풀어보면 등가(等價)일 뿐이다. 끊임없이 다른 생물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는 자연의 먹이사슬에서 인간이 상위에 있다는 것 이외에 더는 부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태어나는 일이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시작임을 생각하면 인간의 죽음이라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다만, 인간이기에 나름의 문화와 언어를 통한 학습의 힘으로 그 의미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저 건너편을 궁금해 하여 숱한 사람들이 죽음 뒤의 일을 알아내려 했지만, 우주의 원소가 결합하여 온 육신이 다시 원소로 분해되어 돌아갈 것이라는 짐작만 하고 있다.

과거에서 온 아릿한 메시지에 많은 상념들이 오갔다. 그래도 내 몸속의 DNA가 죽음의 스위치를 누르지 않도록 열심히 사는 척하자. 앞으로 살아야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속이며 버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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