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 피라미
전주천 피라미
  • 전주일보
  • 승인 2017.07.1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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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 / 수필가

  소년의 놀이터는 전주천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교동으로 이사해서 정말 신났던 건 집 근처에 맑은 물이 흐르는 전주천이 있다는 거였다. 전주천은 소년의 작은 가슴을 넓혀주고 생명의 환희와 물의 두려움을 배웠다. 물은 감히 물에 저항하려는 자는 용서하지 않았지만, 물에 온몸을 맡기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서 자유를 주었다. 생명의 시원이 물에서 시작되었기에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목숨을 얻어 자랐던 편안함처럼 물은 소년을 감싸 안아주었다. 넓고 깊고 깨끗한 물이 유연하게 흐르는 가운데,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현란한 동작으로 몸을 반짝이며 노닐던 그곳에서 물속 세계의 신비를 배우고 물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작은 고기들과 민물새우가 발과 다리를 톡톡 건드리며 피부를 쪼던 경험은 개울 밖에 모르던 소년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시절에 전주천변을 따라 올라가면 한벽루 아래에 제방의 유실을 막기 위해 견치석을 쌓고 시멘트 기둥으로 엮어놓아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해둔 곳이 아이들 물 놀이터였다. 소년은 거기서 형을 따라 헤엄을 배웠다. 개헤엄부터 번개헤엄, 개구리헤엄, 송장헤엄을 익혔다. 처음에는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와 배가 부를 만큼 물을 먹어 토하기도 했다. 물을 두려워하고 겁이 나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면 그럴수록 헤어날 수 없는 게 물이고,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기면 물은 사람을 가볍게 띄워준 다는 걸 배웠다. 소년의 헤엄 실력은 날마다 늘어서 형이 옆에 없어도 혼자 얼마든지 놀 수 있었다. 유아기에 폐렴을 앓아 걸핏하면 감기에 걸리고 허약했던 체질이 종일 물속에서 놀아도 지치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체격이 작고 머리만 큰 소년은 땅에서 달리면 넘어지거나 금세 지쳤지만, 깊은 물속이 제일 편하고 좋았다.

  소년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게 싫었다.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가을이 와도 물가에서 놀아야 즐거웠다. 피라미낚시도 해보고 뭔가 물에서 놀 거리를 찾으려 애썼다. 어느 초가을에 소년은 한벽루 아래 피라미 매운탕 파는 집 앞을 지나가다가 주인아저씨가 낚싯대를 들고 냇물로 향해 가는 걸 보았다. 낚싯대 하나로 피라미나 마자 따위를 잡아 매운탕 집을 운영하는 낚시의 고수라고 알려진 아저씨다. 소년은 먼발치로 아저씨 뒤를 따라가다가 중간쯤의 제방에 걸터앉아 지켜보았다. 아저씨의 행동을 눈여겨보던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아저씨의 낚싯대는 한번 던질 때마다 굵은 피라미가 쉼 없이 달달거리며 끌려 나왔다. 처음 보는 달인의 경지에 소년은 넋을 잃었다. 어떻게 던지는 대로 피라미가 파닥거리며 매달려나오는지 신기했고 특별한 기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주천에 다니면서 낚시하는 광경을 수없이 보았고 애들을 따라 피라미 낚시를 해보기도 했지만, 피라미는 그렇게 쉽게 잡히는 고기가 아니었다. 호기심과 부러움에 소년은 살금살금 내려가서 아저씨의 뒤로 다가가 쪼그려 앉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줄에 아주 작은 낚시가 하나 달려 있고 낚시 조금 위에 작은 방울 납이, 그 위에 하얗고 작은 찌가 달려 있었다. 작은 낚시에 물벌레를 꿰어 휙 하고 물이 흐르는 위쪽으로 던지면 절반도 떠내려가기 전에 찌가 깜박하다가 오똑 서거나 물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낚싯대 끝을 살짝 흔들면 굵은 피라미, 불거지, 마자 따위가 여지없이 걸려 나왔다. 어쩌다 덜 자란고기가 걸려 나오면 아저씨는 다래끼에 담지 않고 물에 가만히 놔주었다.

  소년은 점점 아저씨의 옆에 바짝 다가앉아 낚시채비를 유심히 보면서 미끼를 다는 방법과 던지는 방법까지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작은 손놀림까지 기억하기 위해 온 정신을 쏟았다. 그런데 하얗고 작은 찌는 생전 처음 본 것처럼 생소하고 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걸 알아야겠고, 물에 동동 떠내려가게 만들어서 고기가 물면 발딱 서게 하는 이치를 깨달을 수 없었다. 그때 소년은 아저씨의 먹이통에 물벌레가 몇 마리 남지 않은 걸 보았다.

“아저씨 제가 물벌레 잡아드릴까요?”

“어?? 그래줄래? 고맙지..” 소년은 물이 자작한 곳에 성큼 들어가 납작 돌을 들어 물벌레를 잡아 10여 마리가 되면 아저씨의 먹이통 수건에 넣어주었다. 그 사이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 되었다.

“그만 잡아라.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조금 후에 아저씨가 낚싯대를 내려놓고 대나무 다래끼를 들어올렸다. 다래끼 속에서는 잡힌 고기들이 한꺼번에 튀는 소리가 타다닥 거렸다. 다래끼 절반정도를 채운 피라미와 불거지 등 물고기가 파닥거린다. 소년은 얼른 낚싯줄에 달린 찌를 들여다보았다. 마른 마늘종을 낚싯줄로 묶고 위아래를 불로 약간씩 태운 흔적이 있었다.

“아저씨 이 낚시 어디서 팔아요?”

“너는 아직 못해, 쉬워보여도 해보면 잘 안 되는 거여”

“그래도요.”

“남부 시장에 남문낚시라고 있다. 거기 가서 이 아저씨가 쓰는 낚시 달라고 하면 줄 거여”

“고마워요. 아저씨.”

  그렇게 소년은 피라미 낚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몇 마리 낚고 나면 입질이 뜸해서 자꾸만 자리를 옮겨야 했다. 아저씨는 그냥 한자리서 그 많은 고기를 잡지 않던가? 소년은 그 비밀을 풀기 위해 어느 휴일 새벽에 아저씨집 근처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그 비밀을 풀었다. 아저씨는 낚시할 장소에 미리 가서 괭이로 자갈바닥을 긁어내고 모래 속에 깻묵을 바른 납작 돌을 깔아 고기를 모아놓고 낚시를 했기에 쉬지 않고 고기가 나왔던 것이다. 그 방식을 배우면서도 여러 차례 실패했다. 아무 장소에서나 괭이로 파고 깻묵을 넣어도 고기가 모이는 게 아니었고, 시간에 따라, 물의 양에 따라, 고기를 모을 수 있는 자리가 있음을 깨우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장소에 따라 모이는 고기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 피라미 낚시꾼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소년은 아저씨의 방식대로 고기를 모아놓고 신나게 피라미를 낚고 있었다.

“너 아주 도사가 됐구나.”하는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저씨였다.

“안녕하세요. 저 잘해요?”

“그래, 잘한다. 그렇지만 고기가 잡힌다고 걸리는 대로 다 잡지 마. 나도 이걸로 다섯 식구가 먹고 살지만, 그날 쓸 만큼만 잡는단다. 새끼들은 놔주고. 이것들도 다 세상에 필요해서 태어난 것들이거든. 너도 살다보면 내말을 알 때가 있을 거여.” 소년은 그때, 아저씨의 말은 자기가 잡을 고기를 내가 잡으니까 덜 잡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건성으로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서 곧 잊어버렸다.

  소년은 오래지 않아 피리낚시는 시시한 것이고 붕어낚시로 월척을 잡아야 진정한 낚시꾼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구이저수지까지 버스를 타고 찾아가 노인에게 붕어낚시를 배웠다. 채비를 매고 미끼를 이용하는 방법과 붕어가 움직이는 시간과 경로까지 체계적으로 배워 소년 조사(釣士)의 면모를 갖추었다. 손재주가 남다른 소년의 낚시솜씨에 숱한 붕어가 잡혔다. 성인이 된 뒤에도 젊은 시절에는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오토바이를 타고 낚시터로 달렸고, 전라북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유명 낚시터를 섭렵하며 붕어를 잡았다. 깊은 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시가 떨어진 자리에 잠수해 들어가 풀이나 밑 걸림이 없게 하고 깻묵 붙인 돌을 놓기도 하면서 붕어를 끌어 모아 잡았다. 피리낚시에서 배운 기술이 붕어낚시에도 적용되었다. 물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잠수해서 고기를 끌어 모으는 극성스런 기술로 숱하게 많은 붕어를 잡았다.

  붕어가 흔하던 때이기도 했지만, 갈 때마다 적게 잡아도 50여 수, 많게는 300수 이상을 잡아오기도 했다. 너무 많아서 들고 오기 곤란할 지경이 되면 크기가 작은 순서로 놓아주기도 했다. 잡은 붕어를 아파트 경비실에 주어 아파트 입구에서 주민들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록 할 때도 있었다. 생업을 삼은 것도 아닌 단순한 재미로 그 숱한 생명들을 잡아 죽이면서도 그 붕어들의 깜박이지 못하는 눈이 말하는 의미를 거니채지 못했다.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붕어의 처절한 사투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을 ‘손맛’이라는 이름으로 즐겼다.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거나 피하고자 애쓰는 모습과 붕어의 몸부림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과 마지막 사투를 하던 아내를 떠나보낸 다음이었다. 그렇게 아내를 보내고 그 일을 지켜보아야 했던 이유는 내 무수한 살생이 빚어낸 업보였을 거라는 짐작을 한 것이다.

  내가 노인이 될 즈음에는 바다낚시에 매료되어 낚시를 하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방파제에서 반찬 잡는 생활낚시를 끝내고 차에 돌아와서 동행한 노인이 쿨러를 열었을 때 문득 전주천 피라미탕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동행의 쿨러에는 자잘한 새끼고기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잡아서는 안 되는 사이즈의 치어를 몽땅 잡은 것이다. 왜 이런 걸 잡았는지 물었더니 말려서 겨울에 구워먹으면 정말 맛있다는 거였다. 그 새끼들이 다 자란다면 쿨러 몇 개를 채우고도 남을 터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동행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 순간에 지금은 이 세상에 없을 그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쓸 만큼만 잡는다.”던 그 말이.

  내 손에 끌려나오던 그 숱한 붕어와 피라미와 감성돔, 우럭, 숭어의 눈은 왜 깜박거리지도 않고 동그란 눈으로 날 바라보며 죽어갔는지를 생각한다. 결코 순탄하지 못했던 내 인생 역정을 생각하면 낚시에 걸린 붕어와 다르지 않았다. 모래 속에 묻어 둔 깻묵 냄새에 끌려 모여든 붕어처럼 하찮은 이익을 쫒다가, 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삶의 질곡에 버둥거렸던 내 모습이다. 내가 낚아 죽였던 고기들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내가 ‘손맛’에 느끼던 희열은 삶에서 고통으로 되돌아와 숱한 아픔으로 다가왔고, 오늘도 ‘혼밥’ ‘혼술’ ‘혼잠’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를 편안하게 받아준 물을 배신하여 그 속에서 사는 고기들을 사악한 방법으로 속여서 잡아낸 벌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김고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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