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방문
연초방문
  • 전주일보
  • 승인 2015.01.25 18: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은 낡은 필름 속 ‘대한늬우스’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박정희대통령 시절의 연초 시도방문 행렬은 참으로 거창했다. 이름도 ‘연도순시’로 붙여진 이 행사는 절대권력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거대한 이벤트였다.

이 국가적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공무원들은 몇 달 전부터 밤을 새며 준비를 해야 했다. 지금은 생경한 직책이지만 필경사나 차트사는 당시 아주 중요한 보직이었다. 도지사는 긴 막대기로 차트를 한장 한장 넘기며 지역현황을 보고했는데, 대통령의 시력(視力)과 거리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도표나 글자 크기를 정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대통령이 지나는 길은 늘 긴장감이 흘렀다. 또한 그의 한마디는 법이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연출한 ‘국민과의 대화’도 짜여진 각본에 따라 나눠준 원고를 읽는 것으로 제한됐다.

민초들은 숨을 죽이며 대통령수행단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새까만 썬팅으로 도배한 검은 관용차 행렬이 사라져야 공무원들도 식은땀을 훔쳤다.

대통령의 연도순시는 전국을 얼어붙게 했지만 이 같은 통치행위가 경제성장의 초석이 됐다고 평가하는 이도 많다. 태풍 뒤에 오는 풍어라고나 할까. 하긴 그 시절 강권통치가 없었다면 오늘의 풍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격(格)이 같을 수 없지만 올해도 도지사와 시장군수들의 연초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단체장들의 읍면방문 소식을 들어보니 ‘세월 참 많이 변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군정설명에 이어진 주민과의 대화에서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가 행사장에 가득했다. ‘순시’는 ‘방문’으로 바뀌었고 주민들은 거침없이 목소리를 쏟아냈다.

멀쩡한 다리를 다시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대여섯 호 사는 마을에 경로회관을 지어내라 호통까지 친다. 심지어 군수 답변을 가로 막고 억지소리를 하는 바람에 관계자들이 혼비백산하는 장면도 목격된다. 80년 초 공직에 입문했다는 한 고위공직자는 이 같은 모습을 ‘진풍경’이라 꼬집었다.

하지만 어떠랴. 세상이 바뀐 것을. 어수선하기까지한 연초방문장 분위기는 어쩌면 우리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하는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새해를 맞은 시장군수들이 지역을 찾아 현장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형식이야 어떻든 올 연초방문이 민관 소통을 원활히 하고 행정과 주민간 거리를 좁혀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창종=편집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