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사 성호스님 자격 회복
금당사 성호스님 자격 회복
  • 전주일보
  • 승인 2011.05.2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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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중대한 절차상 하자 있어… 재량권 남용 여지 있다" 판결

진안군 금당사에서 주지직을 수행해 온 성호 스님에 대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제적 징계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법 제50 민사부는 성호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을 상대로 제기한 징계처분효력정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조계종의 제적 징계처분의 효력을 정지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성호스님에 대한 제적의 징계는 중대한 절차상의 하자가 있어 무효"라며 "일부의 징계사유가 존재하지 않거나 징계에 있어서 재량권을 남용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결정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만약 본안 소송에서 멸빈이 무효라는 판결이 선고·확정된다면 멸빈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고 당연히 특별재심 청구의 대상이 되는 징계처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판결했다.

또 총무원이 성호스님을 멸빈보다 가벼운 징계처분에 처하기 위해서는 호법부장이 성호 스님을 상대로 초심호계원 징계심판 청구를 새로 해 원래의 정해진 절차를 모두 거처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멸빈에 대한 효력정지가처분이 내려지고 무효를 구하는 본안소송이 진행중인 상태에서 호법부장에게 징계에 대한 특별재심 청구권을 인정하고 특별재심절차에서 보다 가벼운 징계처분이 선고되어 바로 확정되도록 하는 것은 징계절차에 관한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 결과가 되므로 적어도 이러한 경우에는 호법부장이 특별재심을 청구하는 것은 허용해서는 안된다"며 "결국 제2차 징계처분은 특별재심의 청구권이 없는 자에 의해 청구된 특별재심을 통해 내려진 것이어서 중대한 절차상의 하자가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제1차 징계처분이 무효라는 판결이 선고·확정된다면 제1차 징계처분의 존재를 전재로하는 특별재심 절차에서 내려진 제2차 징계처분도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더불어 "성호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에 대해 제2차 징계처분의 효력정지를 구할 피보전권리를 가지고 나아가 총무원이 제2차 징계처분을 이유로 다시 신청인을 금당사 주지직에서 해임한 점 등 기록 및 심문 전체의 취지에 나타난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보전의 필요성도 소명된다"고 결정했다.

한편 조계종은 성호 스님이 지난 2009년 11월 27일 오전 8시 30분경 제 33대 총무원장 선거와 관련, 괴문서 배포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금당사를 방문한 호법부 직원의 자료제출 요구를 폭언과 난동으로 거부하고 호법부 소임자들을 경찰에 고소했다.

또한 지난 1995년 9월 1일 승인된 토지처분금 전용액의 사용결과를 보고하지 않았고 2007년 상반기에 교구본사에 보관 중이던 7,000만원을 인수 후 임의로 사용하는 등 8개 항목에 대한 승려법 위반한 사실에 의거 지난 2010년 4월 '멸빈(승려의 신분을 없애고 다시 속인이 되게 함)'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성호 스님은 이에 불복해 재심호계원에 상소를 제기했으나 재심호계원이 이를 기각함으로써 징계처분이 확정했고 총무원장인 지난 2010년 8월 25일 '멸빈'의 징계처분을 이유로 성호 스님을 금당사 주지직에서 해임했다.

이에 성호 스님은 지난 2010년 11월 9일 제1차 징계처분인 '멸빈'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고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동월 24일 승려법 제46조에서 정한 멸빈의 사유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한 소명이 없는 이상 제1차 징계처분은 무효라는 이유로 본안판결 선고시까지 제1차 징계처분의 효력을 정지하는 가처분결정을 내렸다.

판결 직후 총무원 호법부장은 재심호계원에 제1차 징계처분에 대한 특별재심을 청구했고 제심호계원이 받아들여 제적의 징계처분(제2차 징계처분)을 내리고 총무원장은 올해 1월19일 제1, 2차 징계처분을 이유로 성호스님을 다시 해임했다.

한편 성호스님은 본안 소송이 확정될 때까지 진안 금당사 주지스님 자격을 회복하게 됐다. 한마디로 지옥에서 천당을 오고 가고 있는 셈이다. <편집자 주>

@용어해설
멸빈- 비구가 죄를 짓고도 뉘우치지 않을 때, 승려의 신분을 없애고 다시 속인이 되게 하거나 그런 일

 

○ 성호스님은
성호스님은 대학2 학년 때인 79년 금산사에서 출가했다. 스님한테 출가 동기를 물었다.

"유신 때였죠, 사찰에서 고시 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 김은학 스님의 금강경 오가해를 하루밤 동안 벼락같이 통독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했습니다"

그로부터 행자 생활을 1년 남짓 하다가 송광사 천자암의 활안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시봉하였다. 91년 동국대 선학과 박사 과정을 마치고 경북 운남사, 충남 대조사, 주지를 역임했다. 90년대 말에는 조계사에서 송월주 총무원장의 비서를 역임했다.

조계사에 있는 동안 종단 개혁을 위해 실천적으로 앞장섰다. 종단 개혁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에 대처하는 공권력에 환멸을 느낀 스님은 조용한 산사가 그리웠다. 그래서 선택한 사찰이 금당사였는데, 사찰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금당사는 너무나 골치 아픈 문제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부임을 망설였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직접 짊어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스님이라면 불도에 정진해야지 세속의 분쟁에 휘말려야 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님은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

금당사를 국내 최고의 호국, 수행, 복지사찰로 만드는 일이다. 우선 대웅전을 중창하는 등 사찰에 각종 시설들을 재배치하고 대대적인 보수와 정비에 나섰다.

주지스님은 금당사가 창건됐던 본래의 터인 나옹굴 일대를 복원 및 개발하는 것이다. 금당사의 맞은편 산 정상에 위치한 나옹굴은 고려 말 고승인 나옹선사가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룬 곳이다.

나옹굴은 입구가 우리나라의 지도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태조 이성계가 이 동굴에서 백일 기도 후 꿈속에서 금척(金尺)을 받은 뒤 조선을 개국했고, 동학농민 혁명지도자인 전봉준 장군의 딸이 10여 년 동안 숨어 지내던 곳이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1906년 호남 최초의 자생적 항일 의병결사 창의동맹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성호스님은 나옹굴을 수행시설로 복원하고 위쪽에는 전망대와 기도원 등을 신축하고 있다.

"대웅전 신축기공식 때는 오색 무지개가 떴어요, 동참한 불자들의 신심을 고취시켜 주었지요. 지금 불사금의 부족으로 공사가 잠시 멈추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00년 된 객사에 노인들을 위한 복지생활관을 건립하였다. 노인들이 남은 여생 부처님과 함께 지내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성호스님은 현 조계종단과의 불화(?)로 10여년간의 주지스님 자리를 내놓고 지난 2009년 11월부터 종단과의 외로운 법정다툼을 하고 있다.

 

○ 금당사는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馬耳山)에 있는 절.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 창건 및 연혁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50년(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 스님의 제자 무상(無上) 스님과 그의 제자 금취(金趣)가 함께 창건한 절이다.
보덕스님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및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보덕스님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의 개조(開祖)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이 중국의 도교에 심취하여 도교를 받들 뿐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650년(보장왕 9)에 제자 11명과 함께 백제의 완산주(完山州)로 내려와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열반경』을 강의하며 백제지역에 불교를 포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그 후 함께 온 11명의 제자 역시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 옛 백제지역에 가람을 창건하였는데, 무상(無上)은 진안의 금당사를,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임실의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문경의 대승사(大乘寺)를,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에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淨)은 정읍에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제자인 계육(契育)과 함께 진안에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단양에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지어 창건하였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창건설은 814년(헌덕왕 6) 중국승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경복사(景福寺)를 근본도량으로 한 열반종의 사찰로 법맥을 이었고, 이후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懶翁)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오도(悟道)의 수행처로서 이름을 높였으며, 조선초기에는 태조 이성계가 이곳 도장골에서 백일기도 후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기도 하였다.

당시는 현재의 위치에서 약 1.5㎞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아 그곳을 고금당(古金堂)이라 불렀으며,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다고 하여 혈암사(穴巖寺)라고도 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침체와 함께 임진ㆍ병자의 양 난을 거치면서 피폐화되었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는 승군 사령부로서 대가람의 위용을 자랑하였으나 이후 승군이 전멸하면서 사찰도 전소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국란을 겪으며 표출된 승병의 국가적 공헌이 어느 정도 인정되면서 1675년(숙종 1) 혈암에서 현재의 터로 자리를 옮겨 중건되었다.
근대에는 동학혁명의 주도자인 전봉준장군의 딸이 10년간 고금당에서 숨어 지낸 곳으로 알려졌으며, 1906년 4월에는 호남 최초의 자생적 항일의병 결사체의 구심체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금당사는 호남지역에서 몰려드는 의병들의 진원지로서, 금당사 주지 대완(大完) 스님은 호남항일의병창의(湖南抗日義兵倡義)의 뜻을 세워 호남항일창의격문(湖南倡義檄文)을 판각한 뒤 격문 200부를 순창ㆍ낙안ㆍ흥양ㆍ여수ㆍ돌산ㆍ장흥ㆍ보성ㆍ강진ㆍ해남ㆍ임실 등지로 배포하였으며, 최익현(崔益鉉) 선생과 함께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금당사에서 행해졌던 일련의 항일운동은 1895년의 을미의병 이래, 1905년 을사의병의 정신을 이은 대중적인 의병운동으로서, 위로는 동학농민운동과 맥이 닿고 아래로는 일제하에서 강렬하게 전개됐던 소작항쟁의 운동과도 이어졌다. 이러한 의병창의의 진원지로 지목된 금당사는 일제강점기에 또 한번 대대적인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피폐화하여 명맥만 유지해온 금당사는 1976년 금당을 비롯한 대웅전 등 모든 전각이 쇄락하고 붕괴됨에 따라, 사부대중들이 힘을 합쳐 중건불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1978년 명부전과 산신각, 1990년에 극락전을 새로 지었으며, 1985년에는 절이름 그대로 금당(金塘) 앞에 미륵불입상을 조성하여 현재의 가람 틀을 마련하였다.<daum 블로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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