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건빵과 시절인연
보리건빵과 시절인연
  • 김규원
  • 승인 2024.10.1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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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백급종/수필가
백급종/수필가

나는 가끔 맛에서 향수를 느끼곤 한다. 물론 어머니께서 손수 지어 주셨던 음식에서는 어느 것 하나 향수를 느끼지 않는 것이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건빵도 오랜 세월 감성을 건드리며 내 뇌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건빵은 모습부터 수수하다. 색으로 치장하고 맵시로 뽐내려 하지 않는다. 수더분해도 내실에 충실하다, 성정이 단순하여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자기 개성만 내세우는 고집불통이 아니라 남과 함께 하길 좋아한다. 그것은 양보하고 배려는 정신에서 시작된다. 요즘은 사람이나 맛이나 자기만의 개성에 몰두하는데 건빵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잼이나 땅콩버터와 함께 먹으면 풍미를 높이고, 우유나 모카커피에 적셔 먹으면 연두부처럼 부드러워서 좋다.

건빵은 출출할 때 먹으면 제격이다. 책을 읽거나 TV를 보다가도 심심풀이로 찾는다. 입에 넣으면 달지 않아 부담이 적고 살짝 고소한 맛에 매력이 있다. 바삭 부서지는 소리에 스트레스도 풀린다. 건빵이 바삭하는 소리는 반항하는 소리가 아니다. 순응하는 소리이다. 어차피 보시하는 몸이라면 경쾌한 소리로 씹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함이리라. 마른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자연의 소리를 닮았다고나 할까?

나이든 남자들은 건빵이라면 고달프고 설움 많던 군대 생활을 떠 올릴 테다. 나는 그보다 훨씬 전 보릿고개 시절 풋바심으로 겨우 배를 달래고도 쪼록쪼록허기를 느낄 때마다 어머니가 내 손에 들려준 고소한 건빵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군대에 계신 아버지가 휴가 때 가져온 것인데 꼭꼭 숨겨두었다가 보채는 자식들에게 안겨 주었던 것임을 먼 훗날에야 알았다.

그 건빵을 들고 동네 고샅을 누볐다.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서다. 때로는 한두 개씩 나누어 주곤 했다. 부러운 듯 바라보는 친구들 앞에서 부린 허세는 꼬마 영웅의 도도함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시절 인연이 있었기에 지금도 건빵에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아버지의 푸른 군복의 늠름한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건빵은 프랑스 군사 식량으로 처음 사용된 빵 부리앙(Biscuit de mer)"이 시초라 한다. 휴대하기 간편해서 우리 군인들도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다. 특히 6.25 전쟁 시 생사를 눈앞에 둔 혹한의 장진호 전투에서 병사들 목숨을 지켜주는데 한몫했음을 아버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고픈 배를 달래며 적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 건빵이라니 감사할 일이 아닌가?

아내와 마트에 가면 나는 제일 먼저 건빵부터 카트에 담는다. 이 모습을 본 아내는 지겹지도 않느냐고 묻는다. 내가 한 여자만 보고 사는 것도 이 건빵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고 하면 빙긋 웃는다. 아내의 눈치를 뒤로 한 채 풍성한 건빵 한 봉지 들고 와서 진열장에 내려놓으면 옛친구와 함께 있는 듯 든든하다. 건빵 모양은 예전에는 네모가 주류였으나 요즘에는 세모, 동그라미, 달팽이, 등 다양하게 변했다. 취향이 다르고 입맛이 까다로운 현대인을 위한 변신이다.

변화는 사물에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가늠하고 있으나 한 궤도에만 얽매여 살아온 주인공이 나다. 일상에 매몰되어 박제된 영혼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고 시대의 변화에도 둔감하다. 건빵 하나를 입에 넣으면서 내 모습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기도 한다.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는 찰스 다윈의 명언을 상기하는 기회도 된다.

건빵에는 고향 맛이 들어있다. 내 입맛이 어릴 적부터 기억하고 있는 친근한 재료로 만든 것이 원인이다. 그런 건빵을 대하면 어린 시절 아늑했던 고향 집이 그려지고 오손도손 살았던 부모 형제의 모습이 떠오른다. 밀 보리밭 등 넓게 펼쳐진 초원이 연상되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노랗게 익어가는 밀 보리 위로 종달새 포르르 날면 나의 꿈도 덩달아 파란 하늘 위로 무지개처럼 피어올랐다. , 순진한 꿈 많던 시절이여!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만나고 싶어도 쉽게 볼 수 없는 얼굴들. 밀 보리밭마저 쉽게 볼 수 없으니 건빵에서 그 시절 그 감흥을 어렴풋이 기억해내곤 한다.

우리 음식 중 제일의 건강식은 보리 비빔밥이요, 보리건빵이라 한다. 영양이나 맛이 우수해서 얻은 명성이었겠지만, 절대 치는 아니려니 싶다. 어쩌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향수)이 은연중 한몫하지 않았을까?

건빵은 초원의 상큼한 맛이 스며있는 녹색주의자다. 농심(農心)을 오롯이 품은 존재다.

녹즙을 마시자. 초원을 걷자. 한 끼는 보리건빵으로.’

건강을 위한 캠페인이라도 전개할까?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그 생명일진 데 거기에 트랜스 지방과 콜레스테롤 함유량이 0%라니 자부심 또한 높으려니 싶다.

오늘도 나는 입이 심심하면 건빵부터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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