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는 ’사탁선화‘가 아닐까?
선화공주는 ’사탁선화‘가 아닐까?
  • 고재홍
  • 승인 2009.04.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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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탁이나 사택(沙宅,砂宅), 사문(沙門), 사(沙)씨를 가진 백제말 왕족에 버금가는 최고 귀족층 상호관계나 왕권과의 역학구조가 백제말과 미륵사 연구에 논란이다.

'봉안기'에 선화공주는 없고 대왕폐하와 사탁왕후만 있다. ‘사탁’의 ‘탁’=<택(宅)에서 갓머리 없음>을 놓고 읽기도 제각각이다. 백제시대 ’탁‘은 ’택‘의 약자로 같은 의미와 발음으로 읽혔을 수 있으나 현행 한문은 ’탁‘이다. 宅이나 門은 沙씨에 붙어 ‘집안과 가문’의 ‘높임말’로 보이나 복성일 수 있다. 안동김씨를 安東金門이라 하는 것과 같다.

北史, 隋書, 新唐書에는 沙.燕.협<十이 없는 協>.解.眞.國.木.백<白 위에 풀초>씨가 ‘백제 8족’으로 기록됐다. 왕족인 扶餘씨에 解·眞씨는 부여계로 북쪽에서 내려온 귀족이고, 沙·燕·苩씨는 남부토착 금강유역 마한계로 추정된다.

사씨는 삼국사기 동성왕(484년) 기록에 內法佐平 沙若思가, 일본서기(543)에 상좌평 사탁己婁가 나와 사비천도 주도세력으로 보이는데 '백제 8족' 으뜸이다.

왕의 장인 좌평 '사탁적덕(積德)', 일제가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쌓은 돌더미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에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과거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을 남긴 대좌평 '砂宅智積', 일본서기 660년 백제멸망 기록과 소정방이 백제정벌을 기념해 새긴 정림사지 5층석탑에도 등장하며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된 대좌평 '沙宅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은 후 일본에 망명한 沙宅孫登, 일본에 망명해 671년 大錦下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沙宅紹明, 관음응험기에 나오는 沙門發正을 비롯 백제말 최고 귀족층이다.

'사탁적덕'에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砂宅智積이다. '積德과 智積'은 똑같이 '積'자가 있고 "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일 수 있다. 대좌평 智積은 관직에서 물러나 백제 유일한 금석문인 비를 남겼다.

"갑인년(654) 나지성(城) 사택지적은 몸이 해가 가듯 쉽게 가고 달이 가듯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해 금을 뚫어 珍堂을 세우고 옥을 깎아 寶塔을 세우니(중략)"라고 기록됐다. '인생무상'을 읊은 내용으로, 도교와 불교가 융합된 백제귀족 정신세계를 알 수 있으며 사찰과 보탑을 세울 정도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 積德 딸이 왕후로 가람(미륵사)을 세우고 석탑에 봉안기를 남긴 것처럼 불교가문이다. 佐平은 고이왕(260)이 만든 백제 최고관직으로 성왕이 관산성에서 죽은 후 왕권약화와 함께 강화됐다. 부족장에서 흡수된 중앙귀족이 선임됐으며, 권력분배를 통한 왕권강화와 귀족득세에 따라 숫자나 위치가 변한 좌평을 통괄하는 상좌평이 설치(408)됐는데 5좌평에서 훗날 6좌평으로 정착됐다. '봉안기'에는 "淨財를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중략)"라고 기록됐다. 가람은 통상 미륵사 전체를 의미하고, "대가람을 선화공주 발원으로 세웠다"는 ‘삼국유사’와 일치해 선화공주는 백제인으로 '사탁선화'일 가능성이 짙다. 봉안기는 '沙乇積德女種善因'처럼 '착할 善'이 두 번 나오는데 '善化공주'와 관련이 없을지?

"서동은 ‘마’를 캐며 살다 훤칠하고 포용력이 대단한 것을 무기로 좌평 사탁적덕 셋째 딸이 '美艶無雙'이라는 것을 듣고 사비(부여)로 간다. 서동요를 퍼뜨려 사탁선화를 차지한 서동은 '흙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지명법사 도움으로 사비궁궐이나 사탁집안에 보내 인심을 쌓고 '왕의 핏줄'임을 내세워 결혼에 성공한다. 법왕이 변란으로 급서한 후 막강한 사탁가문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어릴 적 애환과 첫사랑이 서린 익산에 자주 들린다. 사자사로 가다 사탁왕후는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호와 봉안기를 안치한다. 늙은 대왕의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후 죽어간다"는 것이 정확한 진실이 아닐까? '관세음응험기' 기록처럼 자신의 텃밭인 익산에 왕궁성과 '제석사'를 세우고 천도를 꿈꾸었으나 실현치 못하고 죽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641~660) 즉위 후 '일본서기' 642년에 "모후인 ‘國主母’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그 여동생과 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시켰다"는 ‘국주모‘가 國母인 정실왕후 사탁선화였으나 아들이 없거나 늦게 낳아 다른 왕후 소생인 의자왕이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이 사건과 의자왕초 왕족 41명을 좌평에 임명해 좌평 실권을 뺏은 것처럼 사탁가문과는 대립관계로 보인다. 봉안기 안치 21년후 멸망한 ‘백제 佐平’이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640년후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는 ‘신라 眞平’으로 둔갑돼 기록에도 없는 신라 선화공주가 되지 않았을까?/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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