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는 최고의 교수법이다”
“비유는 최고의 교수법이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7.0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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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70

 

 

 

장마전선이 수도권으로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중남부지방 표심근방에서 머뭇거리는 건

이무기 한 마리가 용산중턱에서 遲剌하기 때문이라는

주술천문대 예보를,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어느 날

목원교회 앞 천국행 무쇠수레들이 왕래부절하는 도로가

우리 집 화분에 핀 꽃들의 심기를 보살피는데

개구리참외 닮은 참개구리가 펄쩍 뛰어 올랐것다

깜짝이야! 반갑구나!

니가 워짠 일이 다냐?

세상나라 물나라 될 줄 알고 나와 봤습니다요!

그랬구나, 그랬더니?

물나라는커녕 불바다가 되어가는 꼴이 하 수상합니다요!

그래, 물나라가 되면 워짤 속셈이었간디?

워짜기는 뭘 어짠데유,

물나라 뭍나라 양다리 걸치며 배운 대로 하는 거지유, !

어떤 공부를 말하는 것이더냐?

, 참 거시기 있잖유?

뭘 말하는 것이냐?

순자선생이 맹꽁맹꽁 갈쳐주신 말씀 있잖아유?

개구리는 물이고 사람은 배라고 했잖아유!

개 굴 개 굴 개 굴 개 굴 개 굴 개 굴……

 

졸시참개구리와 나눈 대화전문

 

자기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자기주장을 대중에게 펴는 데, 그리하여 듣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데 최고의 화술은 비유법이다. 비유법이 글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시법이 애용하는 단골 고객만은 아니다. 더구나 정치인들의 감언이설이나 길거리 호객꾼들이 전용하는 사탕발림만도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알아듣기’ 쉬운 글이나 말의 용법의 비밀은 바로 비유법에 있다.

비유법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사용한 전이[轉移-transference]라는 개념에서 유래되었다고 문예상식처럼 전하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류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고대 암벽화에 그려진 그림들은 훌륭한 비유법이다. 고대 원시인들이 거둔 성과나 생활 모습을 그림으로 엮어 전달하는 이야기는 한결같이 비유 아닌 것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대불교 설화[민담, 전설, 신화]에 보면 숱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모두가 비유법으로 이야기의 핵심을 담아낸다. 불교설화에 ‘앙굴리 말라’라는 이야기가 있다. ‘앙굴리[손가락] 말라[목걸이]’라는 뜻이다. 아힘사까라는 수행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완수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으로 다음과 같은 과제를 받는다. “너는 지금부터 사람을 죽인 후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잘라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라. 손가락이 천 개가 되면 다시 내게로 오라. 그러면 비술을 가르쳐 주겠다.”

이 비유법의 원관념은 “선행은 악행을 덮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앙굴리 말라[아힘사까]라는 수행자는 이 험악한 과제를 수행하다가 드디어 석가모니를 만난다. 그리하여 수행자가 되어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다른 사람이 되고, 자신이 행한 악행에 상응하는 벌을 받으면서 거듭나게 된다. 이런 참혹하리만큼 과도한 비유가 아니고서는 ‘선행으로 악행을 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할 수도 없고, 개과천선하면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신앙심을 심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비유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을 원관념(元觀念-tennor-取義)이라 하고, 원관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차용되는 비유를 보조관념(補助觀念-vehicle-媒材)이라 한다. 그런데 이 취의와 매재 사이에 상시성[常時性-Intersection]이 적을수록 훌륭한 비유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예술적 감동이나, 비유의 효과가 크려면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낯섦과 비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된 표현[말과 글]은 공감이 아니라, 놀람과 비상시적 낯섦에서 효과가 극대화할 수 있다. 이런 원리는 모든 비유에 공통된다. 그러니까 창조가 주목적인 문학이나 예술의 감동은 공감의 영역이 지극히 적은, 놀라움에 의한 그것이어야 한다. 큰 놀라움과, 그 놀라움만큼 다시 큰 인식에의 변화,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의 획득에 의한 감동이어야 한다.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다.[君舟民水]”라는 비유는 앞에서 언급한 비유의 원리에 매우 적합하여 ‘낯섦-새로움’으로 듣는 이를 놀라게 한다. 순자[荀子-BC298년~BC238년]라는 이가 차용한 이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상시성이 전혀 없다. 순자라는 사람에 의해서 비로소 형성된 비유다. 그러니 이 주장[혹은 의견]에 대하여 가타부타 부연 설명이 필요 없으며, 옳다 그르다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전혀 상관성이 없는 두 사물을 묶음으로써 누구도 이의를 달거나, 그 원리의 적합성에 대하여 시비를 걸 수 없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나, 백성을 교화시키는 일에서 가장 탁월한 교수법이 바로 비유법임을 실감한다. 만백성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勸을 쥐고 있다고 자만하는 군주가 순자의 이 언급을 접했을 때, 과연 그 반응이 어떠했을까? 그건 그리 궁금하지 않다.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군주의 횡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굴종하던 왕조의 백성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었을 것이다. 비유의 힘이 주는, 민권이 태동하는 놀람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21세기 가장 문명화된 세계에서 아직도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라는 기원전의 진리를 들먹이는 형편이라면, 참으로 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다못해, 참다못해, 개구리도 아닌 건 아니라고 저리 왜장치고 있지 않는가! 개굴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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