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덤불의 옷(林衣)을 입다”
“가시덤불의 옷(林衣)을 입다”
  • 전주일보
  • 승인 2024.07.0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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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69

 

할아버지 제삿날 첫잔을 올리고 제상 앞에 무릎 꿇고 축문을 읽습니다

서당훈장 할아버지께선 아비 잃은 손자에게 가시울타리를 치셨습니다

천자문을 외우지 못해서 사자소학을 묵필하지 못해서 명심보감에서 보물을 찾지 못해서 윗목 얼음자리에 무릎 벌을 세우셨습니다

아팠지만 따뜻했던 가시덤불옷*을 입혀주시어 할아버지 세수에도 무명한 까막눈을 비벼가며 숲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손자는

 

*林衣: 여린 나무들이 큰키나무로 자라 숲이 되면 자리를 비켜주고 떠나는

가시덤불을 숲의 옷(林衣)’이라고 한다.(우종영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에서)

 

졸시가시덤불옷 林衣전문

사람은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천부의 목숨을 살아낸다고 합니다. 제 몫의 목숨 줄은 어떻게든 이어진다고도 합니다. 모두 생명의 존엄성을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일리 있는 금언으로 새겨들을 만합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영아를 우연히 발견해 생명을 잇게 해준 이야기며, 인큐베이터에서 기르기에도 가녀린 미숙아를 어엿한 숙녀로 자라게 한 눈물겨운 의술 이야기며, 교회에서 마련한 베이비 박스에 두고 간 아기가 선량한 양부모를 만나 잘 자란 이야기며, 전쟁바람에 거리에 나뒹구는 여린 고아들을 거둬들인 미담가화며, 이런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앞에서 한 말이 맞기도 하는 모양이라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러나 당사자들, 그렇게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이 한 생명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모진 비바람과 거친 가시밭길을 거쳐 왔으리라는 것은 겪어보지 않고도 알만합니다.

 

6.25전쟁은 말 그대로 참상이었습니다. 역사적-민족적-세계사적 의미는 알 바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겪은 전쟁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야 했습니다. 당시 어린아이가 그렇게 느꼈음직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마땅히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아버지란 존재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벌어진 이 황당한(?) 현실 앞에서 아비를 잃은 아이는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떠안은 채 가장 비극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어찌 한두 집에서만 그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만, 그렇게 마주한 상실이 아이에게는 나에게만가해진 모진 시련으로 느낀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야 오직 아버지의 부재만이 아픔이었겠지만, 당신의 자식을 잃은 할아버지의 아픔을 어린 손자가 어찌 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비가 없으니 할아버지가 아비 노릇을 하는가 보다고 어림짐작하는 세월을 지나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달 밝은 밤이면 한서를 독송하시는 소리가 어린 손자의 귀에도 즐겁게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비 오는 밤이나, 내린 눈이 뒤꼍의 대나무 숲을 무겁게 짓누르는 날에 들리는 할아버지 독송하시는 소리는 차라리 울음을 삼킨 통곡으로 들릴 법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손자는 행랑채에 차린 서당에 불려갑니다. 훈장이신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니 자발적 탄원을 드린 결과일 것입니다. 할머니시던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졸라서 서당공부를 자청했을 것입니다. 공부라는 것이 그립기도 했을 것입니다만, 그것보다는 아마도 아버지의 부재를 메워 줄 어떤 체온이 그리웠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주제에 무슨 공부 같은 열망을 가졌겠습니까만, 우렁우렁 들리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할아버지의 육성이 아버지의 그것으로 오버랩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날부터 서당의 말석에 자리를 잡고 공부라는 것을 했습니다. <천자문>을 어렵지 않게 책거리를 했습니다. 천자문 책이 없어 삼촌에게 졸라서 한지에 필사한 필사본이었습니다. <사자소학>은 천자문보다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어 공부하는 맛이 났습니다. 그리고 <명심보감>이었습니다. 1장 첫 구절이 子曰 爲善者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報之以禍니라였습니다.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이에 보답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이에 보답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학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아버지 앞에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몇 번인가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의 담뱃대는 어김없이 내 머리통에 내려앉았습니다. 어찌나 아프던지 눈물을 찔끔거리며 킥킥거리던 웃음소리가 싹 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훈장할아버지는 유독 손자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대하셨습니다. 훈장할아버지라는 프리미엄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천자문 책거리를 할 때도 몇 번이고 완전히 암송할 때까지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붓글씨 연습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서당공부의 재미입니다. 필체가 할아버지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어김없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연습을 시키셨습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아들의 몫까지 감당하시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을 것이라 짐작이 가긴 합니다.

 

거칠고 황폐해 어린 나무들이 자라지 못한 산 둘레에는 가시덤불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어린 나무들이 큰키나무들로 자라 숲을 이룰 때쯤이면 가시덤불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가시덤불을 숲의 옷(林衣)’이라고 부릅니다. 사납고 매서운 가시울타리를 쳐서 어린 나무들을 보호하고, 그 역할이 끝나면 가시덤불은 또 다른 황무지로 떠난다니, 자연의 슬기가 놀랍기만 합니다.

 

유독 손자에게 엄하셨던 할아버지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아들 잃은 한과 아비 없는 손자의 가시울타리가 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할아버지도 역할을 다하셨다는 듯, 79세를 세수歲壽로 마치시고 또 다른 황무지로 떠나셨습니다. 필자의 꼭 지금 나이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낳습니다. 한 생명이 제 몫의 목숨 줄을 이으려면 따뜻하고 부드러움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거칠고 사나운 가시울타리의 조력도 필요할 법하다는 진리를 자연에서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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