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향기 넘실대는 곳
꽃 향기 넘실대는 곳
  • 전주일보
  • 승인 2024.05.1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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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백급종/수필가
백급종/수필가

봄이 농염하게 짙어가고 있다. 온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진다. 완산골 언덕에도 철쭉이 만발했다는 소식이다. 반가웠다. 아름다운 꽃잔치는 아무 때나 보여주는 것이 아닐 터, 행랑을 꾸리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향긋한 꽃 내음이 간간 스쳐 갔다.

이어진 나무 계단을 올랐다. 바로 그 앞.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꽃 무리가 나를 맞는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철쭉꽃, 왕 벚꽃, 해당화, 황매화, 배롱꽃도 아름답지만, 터널을 이룬 겹벚꽃이 장관이다.

꽃의 여신 <플로라>가 마음껏 뿌려 놓은 것인가? 몽글몽글 덩이를 이루어 흐드러진 꽃들이 화사하다 못해 요염하기까지 하다. 자연은 저렇게 곱고 맑은 물감을 어디에 품고 있다가 일시에 내 풀어놓은 것인지? 바라만 보아도 내 몸에도 꽃물이 드는 듯하다.

꽃들은 품고 있는 모든 열정을 한 점 남김없이 다 쏟아내며 나 여기 있노라, 피었노라, 자랑하듯 붉은 미소를 토해낸다. 옷에는 꽃물이 들고 몸에는 그 향기가 배어들었다. 몸에 밴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꽃구경에 넋을 놓고, 향기 넘실대는 꽃 바다에 풍덩 빠져들고 있다. 꽃 속에 묻히니 사람이 꽃인지, 꽃이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꽃도 아름답지만, 그 꽃에 어울리는 사람들도 참 곱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와도 잘 어울리는 정경이다. 외양만 아름다울 것이 아니라 꽃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꽃향기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공간에서 느낄 수 있지만, 좋은 사람의 향기는 세상에 널리 퍼져 시공을 초월하여 가슴에서 가슴으로 면면히 이어지지 않던가?

그런데 아쉬운 것은 꽃에 벌 나비를 찾아볼 수 없다. 예전 같으면 채밀(採蜜)하느라 윙윙거리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안 날아오는 건지? 못 날아오는 건지? 깊은 곡절이야 알 수 없지만, 요즘의 이상기후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좀 씁쓸하다. ‘

꽃 외면하는 벌 나비 없고, 벌 나비 못 본 척하는 꽃 없다는데 인간이 저지른 자연 훼손으로 벌과 나비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봄 햇살에 얼굴을 내민 꽃이 볼그레 웃고 있었다. 나는 꽃을 보며 잠깐 부질없는 생각에 잠겼다. ‘나도 너처럼 한 송이 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온 세상 시름 다 잊고 아름다운 향기만 풀어내면 될 터이니.’ 이때 내 안에서 울림이 뇌성처럼 들려왔다. ‘속세에 찌든 네가 꽃이 되려면 억겁의 세월 속에 가꾸고 다듬어도 어림없으리라.’

꽃은 왜 아름다울까? 어느 시인은 무리하지도, 욕심내지도 않기에 아름답다’. 했다, 또 다른 이는 아픔과 기다림 끝에 피었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꽃은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순도 높은 색상과 농밀한 향기를 마음껏 쏟아내기에 아름답고, 누구인들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진정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마음 또한 꽃처럼 예쁘고 깨끗해야 할 것이라면 지나친 억지일까?

은은히 피어오르는 꽃의 향연에 문득 분홍빛 그리움 하나가 실루엣처럼 떠 올랐다. 봄바람이 이마를 스쳐 가는 꽃그늘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책 읽고 소꿉장난하던 초등학교 시절, 봄이면 그 운동장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나비가 날아들면 나비 따라 놀고, 꽃잎 날리면 꽃잎 따라 나풀나풀 춤을 추곤 했다. 나의 얼굴은 서서히 진분홍 꽃잎처럼 붉어졌다. 내 곁에서 따라 하던 소녀도 물기 어린 꽃봉오리를 닮아 갔었다.

꽃동산을 조금 벗어나니 산자락으로 이어진다. 비탈길 따라 오를수록 울울창창한 숲이다. 산새가 간간이 적막을 깨뜨리고 솔향이 콧속으로 스며온다. 꽃은 꽃대로 향기롭고 숲은 숲대로 싱그럽다.

꽃은 풋풋하고 자유 분망한 아가씨의 청순함이라 하면 숲은 중후한 노년의 정제된 여유라 할까? 꽃과 숲은 마음을 정화하고 힐링을 안겨주는 매력은 같으나 그 차원은 좀 다른듯하다.

모처럼 꽃 향과 솔향에 취해 보았다. 혼탁한 마음 구석이 맑은 물로 씻은 듯 밝아진다. ‘()는 그 진가를 감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소유한다.’라 는 말과 같이 내가 오늘 꽃의 아름다움과 숲의 청량함을 오롯이 누린듯하다.

꽃잎 다보록이 쌓인 된비알 위에도, 햇빛 비켜 내린 숲속에도 향내가 일렁인다. 모두 발길 따라온 여향(餘香)인가 싶다. 내 마음에도 환희가 잔잔히 밀려온다. 마치 함초롬히 꽃물이 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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