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 잘 맞는 자연인생”
“죽이 잘 맞는 자연인생”
  • 김규원
  • 승인 2024.05.1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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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詩想隨想 - 62

 

내가 푸른 옷이었을 때

내가 새의 노래였을 때

그리고

내가 피톤치드 가득한 확신을 호흡하였을 때

열 벌이나 되는

책벌레 푸른 등을 타고 넘어서 가는

열 켤레나 되는

시심으로 엮은 누더기 짚신을 벗어던져도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 길이

슬픔을 기쁨으로 덮거나, 혹은

웃음으로 눈물을 지우거나

무성한 녹색바람은 가리면서 열어 주었다

내가 가야만 하는, 그 길을

 

졸시죽이 잘 맞다 -편백나무 숲에서전문

내가 시를 염두에 두고 살아온 것은 참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노년에 무엇으로 나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무엇으로 나를 달랠 수 있었을까, 무엇으로 이 허무를 메울 수 있었을까, 아니 무엇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생각할수록 막막하지만, 그럴수록 시를 염두에 둔 건 참 잘한 일이라 여긴다.

아무리 오래 살든, 아니면 짧게 살든 인생행락 백년이다. 그 백년이라고 한결같지 않다. 어느 시절엔 푸르른 옷자락을 휘날리며 원기 왕성함을 자랑할 때도 있다. 두려울 것이 그리 많지 않으며, 망설일 일이 그리 흔치 않은 시절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마냥 그렇게만 살 수 없어서 인생이다. 먹구름은 사계절 하늘을 덮고, 폭풍우는 때를 가리지 않고 앞길을 가로막는 날도 있다. 그렇대서 멈추거나 머뭇거릴 수 없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두 눈을 부릅뜨고 제 길을 찾아내야 한다. 폭풍우가 발걸음을 막으면 휘청거릴지언정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게 인생길이다.

그렇게 휘적휘적 걸어오다 보면 아름답기만 하던 저녁놀이 아침놀에 비해 그리 반갑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날이 온다. 그런 날이 잦을수록 홀로 지내는 시간도 많아진다. 그런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오지 않아도 그만인 불청객, 허무가 자리를 잡는 것도 이 무렵이다.

그래서 인생은 다음 세 단계를 지나오는 것인가 보다. 첫째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단계다. 인생은 스스로 원하지 않았지만 일정한 환경에 던져지면서 비롯한다. 자연이라는 천부의 조건, 사회라는 인위의 조건이라는 환경이다. 여기에 던져진 우리는 유기체라는 속성을 애면글면 부여잡고 살아남기 위해 전심전력한다.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환경에 그런대로 적응해 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만들어가는 인생의 단계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단계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상[꿈]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유기체로서 그저 주어진 생명만을 유지하려 해서는 이 시기를 무사히 지나갈 수 없다. 유기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꿈[이상]을 향해 전진해야 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형태이든지 몸의 노작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노동은 유기체가 한 단계 성숙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 존엄성의 영역으로 전이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셋째는 완성을 향한 노년의 단계다. 이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지혜[般若]를 바탕으로 회귀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노년을 흔히 소멸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치부하면서 소홀하게 취급하려 한다. 이 단계를 슬기롭게 지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이다. 지금까지 거쳐 온 단계는 곧 이 단계를 완수하기 위한 준비로 보아도 괜찮다. 해탈解脫이라는 불교 용어로 보면 고뇌와 속박으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주어진 단계를 거쳐 온 인생이, 만들어가는 인생의 단계를 지나, 비로소 도달하는 세계는 깨달음을 통한 해탈의 경지가 되어야 한다.

노년이 되면 행동반경은 줄어들지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나지 않던가. 그래서 노년은 인생의 단계에서 볼 때 완전한 시간을 갖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 막중한 단계를 맞이하려면 “인생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모지스)이라는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es, 1860-1961) 할머니는 76살에 화가에 입문하여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고, 뉴욕 타임스 등 미국 언론이 “미국의 국보”라며 칭송한 인물이다.

지난 주말에 금구에 있는 편백나무 숲을 찾았다. 시문학 공부에 전념하는 회원들과 함께 한 봄나들이[賞春]다. 연세는 50대에서 7.80대이지만, ‘늦깎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문학 공부를 단서로 한 인생 공부, 인문학 공부에 대단한 열정을 보이시는 분들이다. 모지스 할머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창작 활동에 왕성하신 분들이다. 공부를 통해서 창작의 기쁨이 주는 성취감과, 나날이 성장[변화]해 가는 노년을 대견하게 여기며 매일 매일 완성을 향해 정진하신다.

시문학에 투신한 삶에 평생 보람을 가졌듯이, 이분들 역시 그런 보람으로 “열정이 쇠퇴하면 영혼에 주름이 생기고, 삶이 쇠퇴하면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는 금언을 실천하고자 한다. 시문학을 공부하는 회원들과 함께 봄나들이를 하며 죽이 잘 맞았다. 하나는 우리 삶의 목표가 시를 잘 쓰는 것보다, 시를 잘 사는 것이어야 한다는 다짐에서 서로 죽이 맞았다. 영혼의 울림이 없는 건조하게 빛나는 언어의 기술을 자랑하지 말자는 뜻이다.

다음으로는 삶의 지향점과 자연이 베푸는 은혜로움에서 죽이 참 잘 맞았다. 꽃보다 좋은 신록이라고 한다. 신록의 무엇이 그럴까, 생각해 보니 바로 온몸과 온 마음 가득 넘쳐흐르는 생명의 환희 같은 것이었다. 이런 환경이라면 소멸이 아니라 회귀를 위해, 허무가 아니라 해탈을 지향하는 데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다. 자연과 시와 인생이 죽이 잘 맞는다면,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엇지하”(정극인「상춘곡」결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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