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공원에서
  • 김규원
  • 승인 2023.04.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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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풍/수필가
최규풍/수필가

  거마 공원에 붓꽃이 만발하였다. 노인들이 아침에 집에 머물기 무료해서인지 일찍들 나와서 의자에 앉기도 하고 운동기구에 매달려 몸을 풀기도 한다. 남자 한 분이 내 또래로 보이는데 의자를 대걸레로 닦았다. 나는 겨우 내 집 안 거실과 방들을 닦는데 저분은 밖에 나와서도 걸레질을 한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마음씨가 고운 분이다. 집을 나와서도 공공장소에서 청소하는 분이라면 집에서는 오죽이나 청소를 잘할까 싶다. 사회봉사를 별로 해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배울 점이다. 사방이 확 트인 공원이 노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도 도심의 답답함을 해소할 피난처요 심신의 피로를 녹일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가 되겠다.

  길 건너 효문여중 울타리에 장미가 만발하여 손짓했다. 학교나 가정에서 덩굴장미를 담에 올려서 행인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니 심고 가꾸는 이도 공원을 가꾸는 분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뒤편으로 잠깐 걸으니 약수 공원이 있다. 소나무 수십 그루가 울창해서 도심 속 숲이다. 거마공원이 확 트인 시원함이 자랑이라면 약수공원은 사색하기 좋은 고요함이 장점이다. 인적이 드물고 자동차 소음도 없다. 가까운 거리에 이와 같은 조용하고 호젓한 공원이 있으니 도심 속의 오아시스다. 하늘은 모처럼 이른 새벽부터 샤워한 것처럼 본래의 파란빛이 드러나고 미세먼지 농도가 보통에서도 훨씬 낮아 흠뻑 들이마실 수치다. 입김으로 눅눅하고 숨쉬기에 갑갑한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아랫배 단전까지 맑은 공기를 깊숙이 마음 놓고 들이켰다. 공기가 신선하니 발길은 나를 듯이 가볍고 아내와 나란히 산책하기에 절로 신바람이 났다.

  모정에는 노인네들이 그득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노인들의 수는 늘어나고 부양의 짐을 진 젊은이들은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 노인들은 늘어나고 어린아이들은 줄어든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출산을 꺼리거나 결혼을 피한다. 아이 하나를 낳아서 기르고 가르치고 독립시키려면 경제적 뒷바라지가 엄청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학교나 학원이나 사교육이 없었다. 부지런히 씨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았다. 마을마다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그칠 새가 없었다. 요즘은 시골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노인들만 사는 시골 마을이 머지않아 텅 빌 것이다. 갈수록 젊은 생산 인구는 줄고 고령의 소비인구는 늘어나니 후손들에게 짐이 커진다. 이대로 아이를 적게 낳으면 언젠가는 인구가 부족한 나라가 될 것이다. 마음 놓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할 묘책이 없을까?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초면이다. 혼자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끝도 없이 입담이 좋으셨다. 연세를 물어보니 91세였다. 진안 성수면 용포리 포동 마을에 살다가 전주로 이사를 왔다기에 내가 서생원 이야기를 꺼냈다. 서생원은 동서의 손아래 처남이다. 할머니가 그 집을 소상하게 잘 알고 술술 실타래를 풀듯이 이야기를 하였다. 묻지도 않은 것까지 모두 말하는 데 끝도 없이 이어질 기세였다. 처음에는 혼자서 중얼거리기에 치매에 걸렸나 생각하였는데 그게 아니고 들어보니 총기가 좋은 분으로 홀로 사는 외로운 할머니였다. 영감님은 간 지 20년이고 아들과 딸은 아파트에 떨어져서 살고, 자기는 아파트가 싫어서 혼자 단독 주택에 살다 보니 사람이 그립단다. 이야기할 상대가 귀하고 노인네 말을 들어줄 한가한 이웃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내외를 만나니 봇물이 터진 것이다.

  노인의 고독사가 늘고 있다. 할머니의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내외한테도 언제 닥칠지 모를 일이다. 대화할 사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운가. 서생원의 흉도 보고 아들딸 이야기도 줄을 달았다.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틀어놓은 것 처럼 생생하였다. 어쩌면 저리도 기억력이 좋을까? 나는 이미 기억력이 감퇴하여 깜빡깜빡하는데 내가 저 연세에 이르면 저와 같이 뚜렷하고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없다. 할머니의 저 놀라운 총기와 푸짐한 입담이 부럽다.

  공원을 떠나면서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제 내 나이에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공연한 세상사에 관심을 두기보다 건강한 몸에 기억력을 살리고 지킬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러기 위해서 오늘처럼 자주 산책에 나서고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하겠다는 다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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