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라니
독재자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라니
  • 신영배
  • 승인 2023.04.0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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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배 대표기자
신영배 대표기자

세상이 마구잡이로 돌아가기 시작한 지 벌써 1년이다. 이 정부가 들어선 뒤에 벌어지는 모든 일이 정당성과는 거리가 멀고 순서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냥 마구잡이 식으로 돌아간다. 그저 대통령이 말하면 법이고 시행 원칙이 되는 그런 나라가 됐다.

그런데, 대통령만 아니라 중요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비슷하다. 제멋대로이고 막무가내로 저마다 일을 저질러놓고 본다. 그러다가 대통령 눈에 벗어나면 발에 밟힌 개구리 꼴이 되지만, 아마도 대개는 눈치를 보거나 내락(內諾)을 받아 시행하는 듯하다.

최근에 이상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세간의 화제로 등장했다. 이 나라 초대 대통령으로, 4·19혁명에 쫓겨나 하와이에서 생을 마친 이승만을 보훈처가 나서 전 대통령 자격이 아닌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 기념관을 짓는다는 것이다. (사)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회 전북지부장인 필자는 독재자 이승만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할 수 없다. 뭔가 불쾌하고 뱃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속이 뒤틀린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실체는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드러난 지 오래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에서도 등장했다. 보고서에는 그는 기회주의자였고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체했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거짓말을 일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을 따르는 교민들을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 모아놓고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가 스스로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런데 그를 독립운동가로 만들어 기념관을 짓는다니 정신이 나간 짓이다.

1912년 11월 15일 자 워싱턴포스트지가 이승만과 인터뷰한 내용 가운데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일합방후 3년도 지나기 전에 조선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뿌리깊은 친일파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버드대학 석사 코스를 밟다가 학점미달로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수단을 썼는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도 없이 박사학위를 받는 재주를 부린 것이다.

그가 하버드에 연락해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는데 석사 학위를 줄 수 없겠느냐고 설득해 하버드대학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이승만은 목적을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는 재주가 비상했다고 한다. 때로는 반대편 인물을 고발하거나 모함해 파멸하게 하는 수완도 능했다고 평가된다.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것도 미국 하버드 석사에 프린스턴 박사라는 그의 이력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가 하와이에서 교민사회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이력이 당시 임정 요인들에 어필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일하면서 대부분을 하와이에서 보냈고 독립운동자금을 모두 자신이 관리하면서 돈줄로 임시정부를 농락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지만, 관리하던 돈조차 내놓지 않아 임시정부를 어렵게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 그가 해방되자 맥아더를 만나 초대 대통령 자리를 얻게 되고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친일파를 중용하였다. 해방 공간에서 반민특위가 구성돼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하고 처벌하려 했지만, 외려 경찰을 보내 반민특위 위원들을 체포하고 끝내 해산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이 없었다. 해방 후 김구, 여운형 등 임시정부 독립투사들이 암살당한 배후에도 그의 힘이 작용했으리라는 의견들이 지금껏 이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친일 후손들에 의해 자꾸만 과거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근본 원인이 이승만에 있었음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가 대통령에 오르는 바람에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발전하지 못했고 그의 정적들은 거의 죽었다.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못해 언제나 강한 자의 편에 붙어야 영달과 부를 누릴 수 있다는 사회정의가 만들어졌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성공만 하면 그만인 비열한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후 12년간 국무총리 이하 각료 115명이 친일파였고 국회의원 851명 가운데 338명이 조선 총독부 등 기관에서 근무했던 자이고 경찰 총경 70%, 경감 40%, 경위 15%가 일경 출신이었다.

또 재임 기간 내 육군참모총장 8명이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었다. 더욱이 그는 6.25 전쟁 때, 경무대와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한 후 라디오 방송(사전 녹음)을 통해 "국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시민들은 안심하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시민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 치하에서 불안에 떨거나 사망했다. 그는 사실상 범죄자였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독립운동가라는 칭호를 붙여 기념관을 세운다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방해한 인물로 분류해야 할 사람이다. 누구는 그가 건국의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누가 대통령이었어도 이승만보다는 잘했을 것이다. 최근에 보수 언론이 그를 치켜세우는 영상을 내보내는 걸 보면 보훈처가 건립하려는 이승만 기념관도 정부여당의 어떤 움직임에 따라 추진하는 일로 의심된다. 찐 보수들이 어떤 구심점으로 이승만을 선택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조작이나 추켜올리기로 변조할 수 없다. 무지막지(無知莫知)한 권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민족의 양심과 정의조차 힘으로 뭉갤 수 있는 건 아니다. 독재자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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