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의 그루터기를 지키는 4월 정신
한겨레의 그루터기를 지키는 4월 정신
  • 김규원
  • 승인 2023.03.27 12: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상수상詩想隨想-13

 

그루는 나무를 세는 셈법 터기는 나라가 나라에 접목된 이종교배 그런다고 한 나라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셈법교배를 아무리 해도 나무가 타고나면 남는 그루터기숨길이 막혀도, 손발이 묶여도, 화상 비집고 터져 나오는 독립만세 자주깃발 고사리손길 내미는 연두깃발 열매도 맺지 못하는 왜목과 교배하자고 산마다 화마를 심고 그루터기마다 성냥을 그어대는 철부지 방화범 왕손의 불장난으로 불타는 산하는 언제나 사월, 우리에겐

-졸시산불 -내 서정의 편파성4전문

  우리말의 됨됨이를 보면 우리나라 역사가 보인다. 우리말에는 유난히 한자 말과 고유어가 한데 어울려 된 말들이 많다. 역전앞이나 처갓집 등의 말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말이라서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이런 말들에도 국립국어연구원은 면죄부를 준다. 이미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관용구이므로 그냥 그렇게 쓰도록 용인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속뜻은 고칠 수 없음으로 틀렸어도 그냥 쓰자는 뜻일 터이다.

 

무슨 뜻인지 미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쓰는 튀기 말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를테면 어떤 글을 인용하고 그 글의 출처를 밝히면서 중에서라고 쓴다. 이 표현은 이나 에서라고 해도 충분히 그 뜻을 알 수 있으련만, ‘이라는 한자 말을 굳이 살리려는 눈물겨운 지성(?)’의 노력과 우리말 토씨인 ‘~에서를 업신여기며 못미더워하는 생각이 낳은 표현일 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수천 년 중국의 영향권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역사와 백성들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밥 먹는다는 촌스럽고, ‘식사한다고 해야 유식하며, ‘일한다고 하면 수준이 낮고, ‘노동한다-근로한다고 해야 신성하게 일하는 사람이 되는가. ‘쉰다는 백수나 하는 것이고, ‘휴식한다고 해야 잘 쉬는 것인가. 문제는 의식이다. 철저하게 오랜 세월 세뇌될 대로 세뇌된 의식은 우리말의 됨됨이를 아예 잊어버리고, 남의 나라 의식으로 먹칠이 되고 말았다.

 

중국의 뒤를 이은 일제 식민통치의 치욕은 고스란히 말과 의식을 지배한다. 낱말에서 일제의 잔재를 털어내려고 애써온 결과 상당 부문 일어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다. 그러나 식자 연하는 사람들이 쓰는 글이나, 권위주의를 내세워야 권위가 산다는 듯이 권위를 말끝마다 내세우는 법관들이 쓰는 판결문의 어투-문투는 여전히 일제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이오덕 선생께서 평생 다듬어온 <우리말 바로 쓰기>에는 우리말을 병들게 한 일본말의 찌꺼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낱낱이 밝혀내고 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는 하면 될 걸, ‘일본에 있어서는이라고 하여 일본말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 씨 부부 망명설 진위 밝혀야’.”하면 될 걸, “전씨 부부 망명설 진위 밝혀져야’.”라고 일본어 피동형을 함부로 써서 우리말의 됨됨이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말의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일본어 투는 아무리 쓸어내려고 노력해도 쉽게 지울 수 없는 병균-세균 같은 존재다.

 

요즈음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봄을 맞아 산불이 자주 난다. 보도에 따르면 작년에 산불에 나무들이 고사한 줄 알았는데, 그 나무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난다고 한다. 나무줄기는 불에 타서 시커멓게 그을렸고, 잔가지나 소나무 등 상록수의 나뭇잎들도 불길에 견디지 못하고 누렇게 시들었지만, 나무뿌리는 타지 않고 모진 화마를 잘 버텨낸 모양이다. 참으로 강인한 자연의 생명력을 마주하자니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뿌리를 지탱하고 있던 나무그루터기란 말이 참 소중하게 들리고 보였다. ‘그루터기풀이나 나무 또는 곡식 따위를 베어 내고 난 뒤 남은 밑동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의 됨됨이가 재미있었다. ‘그루는 수 관형사 뒤에 쓰여 나무의 수를 세는 의존명사다. 이 명사가 터기를 만나서 그루터기가 되었다. 그런데 터기+로 이루어졌다. ‘는 고유한 우리말로 건물이나 구조물 따위를 짓거나 조성할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에 한자어 를 더한 말이다. 그러니까 만 가지고도 충분히 뜻을 드러낼 수 있는데, 한자말의 찌꺼기를 더해서 터기를 쓰는 셈이다. 한자 자전에서 를 찾으면 터 기라고 풀이한다. 이 풀이를 그대로 끌어다가 그루터기라는 말이 우리 고유어처럼 쓰이게 되었다. 고유어인 줄 알았던 그루터기마저 한자어의 흔적이 있다니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럴지라도 이 그루터기를 잘 지키는 것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수천 년 우리의 말과 의식으로 굳어진 말이기 때문이다. 말의 그루터기를 지키는 것은 정신과 의식의 그루터기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4월이다. 그렇잖아도 건조한 날씨 탓에 산불이 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인다. 비록 산불로 나무들이 타버린 산이라 할지라도 그 밑동, 뿌리를 간직한 그루터기만 잘 지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자연이 간직하고 있는 생명의 회복력이 참으로 아름답고 눈부시다

 

자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은 역사의 그루터기마저 태우려 한다. 참으로 참담한 형국이다. 민족의 자존감이네, 역사의 정의는 그야말로 시간의 역사에 맡겨두기로 하자. 그럴지라도 유명 무명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혼이 깃든 이 강토, 이 산하를 바르게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한겨레의 민족정신은 생명의 그루터기이기 때문이다.

 

4월이 눈부시게 밝아 온다. 누가 이 아름다운 산하를 함부로 태우려 하는가? 4월의 민족혼이 시퍼렇게 살아서 역사의 불장난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