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촛불은 시대의 부재를 밝히는 별빛이다
광장촛불은 시대의 부재를 밝히는 별빛이다
  • 김규원
  • 승인 2023.03.2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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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수상-12

 

 

 

가슴 졸이지 않는 손으로 스위치를 한껏 올려 베토벤 교향곡 3번을 건다 아래층 오른쪽 방에 사는 영감은 무슨 러시아 전쟁 났느냐며 집전화질로 소음화풀이를 할 것이고 다음날 복도에서 만난 위층 왼쪽 방에 사는 빅토리태권도 사범은 어제 울린 이 무슨 이었는지 음원 좀 빌리자며 인사할 것이다 귀는 빌려드리되 영웅을 지운 영웅교향곡이 우리네 광장교향곡이 될 수 있을지 볼륨을 한껏 올린 단서를 붙일 것이다 그러면 기둥 없는 집이 부르르 떨며 광장촛불로 타오르기는 할 것인지

 

-졸시볼륨을 크게 하고 -내 서정의 편파성3전문

 

공동주택에 살다가 단독주택으로 이사 온지 몇 년이 흘렀다. 사람 사는 집이 어디건 좋은 점과 나쁜 점은 있기 마련이다. 공동주택의 편리성을 왜 모르랴. 아파트에서 산 십여 년은 그 편리함과 불편함, 유리함과 불리함을 실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편리함과 유리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셈이니 내버려두고 문제를 삼지 않는다 치고, 내 개인의 처지에서는 불편함과 불리함이 더 이상 아파트살기를 거부하였다. 가장 심기를 어지럽힌 건 내 취향의 문제와 관련되었다. 음악을 삶의 자양분이자 위로의 매체로 삼기에 서툴게나마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하루의 피로를 씻기도 하고, 전축의 볼륨을 한껏 올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이게 불가능했다. 피아노를 뚱땅거리거나, 볼륨을 마음껏 올린 채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은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침과 저녁은 위아래 층 입주자에게 소음이 될 것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주말이나 공휴일 역시 공동주택이란 점을 생각하면 다른 이들의 휴식을 방해할 것이니 역시 삼가야 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일들이 나를 주눅 들게 하였다.

 

그래도 그런 일들은 참으면 그만일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난감한 것은 계절감이 둔해지는 듯했다. 어린 시절 잔뼈가 시골에서 굵어진 탓으로 계절의 변화에 유난히 민감한 편이다. 봄이 되면 나도 모르게 온몸이 군실거렸는데 이를 달랠 길이 막연하였다. 아지랑이가 들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일어나는 증상으로 바뀌었다. 아파트에 살다보니 이게 몸살처럼 계절병처럼 나를 채근했다.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라는 텃밭의 초록세상이 눈앞에서 일렁거리고, 가을이면 쓸어내도 또 쌓이기만 하던 낙엽들을 긁어모으던 마당 쓸기의 노작이 그립기만 했다. 겨울이면 또 어떤가? 소복이 다녀가신 밤눈을 쓸어 대문까지 길을 내고, 골목길을 쓸어 겨울을 마중하던 몸의 무늬가 나를 채근하곤 하였다.

 

이런 일들을 아파트살이가 주는 편리함과 유리함만으로 지우고 살기에는 아까운 상실이요 손해라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마음먹은 대로, 취향이 가리키는 대로 함부로 옮겨 살 수도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의 실상이기도 하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악덕과 미덕 사이에서, 계절감이 주는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부대끼며 유보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형편이기도 하다.

 

베토벤 교향곡3번은 영웅교향곡이라고 불린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때 나폴레옹은 승승장구하는 프랑스의 영웅이었다.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통령이 되어 장기집권의 밑그림을 그리더니, 마침내 스스로 황제가 된다. 민초들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어느새 민중의 삶을 전쟁의 진구렁과 이글거리는 숯불더미로 몰아넣는 독재자로 변신한다.

 

베토벤은 점점 어두워지는 청력을 붙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에 매우 강한 애착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 교향곡3번의 표지에 영웅Eroica이라는 헌사로 나폴레옹을 기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 즉위했다고 하자, 베토벤은 그 역시 속인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 폭군이 되려는가!” 분노했다고 한다.

 

결국 베토벤은 이 곡에 신포니아 에로이카-한 위대한 인물을 추념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고쳐 출판한다. 민중혁명의 영웅인 줄 알았던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이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베토벤이 가졌던 기대가 실망을 넘어 분노에 이른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교향곡이 주는 감동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전체 4악장으로 구성되어 1악장부터 매우 강렬한 음향으로 엄청난 힘에 의한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나도 모르게 음악에 몰입하다 보면 뻗쳐오르는 에너지가 어떤 불의한 세력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 힘에 압도된다.

 

2악장은 장엄하게 전개되는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이다. 이 곡을 완성한 17년 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을 때 베토벤은 나는 17년 전부터 오늘을 예상해 왔다.”며 제2악장 장송 행진곡을 가리켰다고 한다.

 

시대를 뛰어넘을 명작은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준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권력도 민중의 삶[생명]을 진구렁과 숯불더미로 몰아넣고 권력욕에 빠진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예술은 지성과 미학에 의존한다. 지성은 불의한 세력을 불의하다 말할 수 있을 때 힘이 된다. 미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슬기로움이다. 이 두 힘이 결합되어 시대의 불의를 뛰어넘고, 역사의 훼손을 용납하지 않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그런다. 나이만 많다고 어른이 아니다. 나이만 젊다고 청년이 아니다. 광장의 촛불정신이 바로 지성과 미학의 현장임을 자각할 수 있을 때, 노인은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으며, 젊은이는 청년다울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부재를 환기하는 일이다.”(M.블량쇼.프랑스.철학자) 촛불은 시심이다. 광장촛불은 우리 시대에 무엇이 부재하는가를 보여주는 별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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