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감동은 아픈 삶의 치료제다
예술적 감동은 아픈 삶의 치료제다
  • 김규원
  • 승인 2023.03.13 13: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상수상詩想隨想-11

 

마음자물쇠가 고장 났다는 형씨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주문하자 엠씨는 친절하게도 밥은 잘 먹는지 운동은 잘 하는지 잠은 잘 자는지 피아노시모로 검은 건반을 타건해 보라 권유했지 그러자 때 아닌 나비 떼가 닫힌 창문의 커튼을 열고 날아드는데이럴 때면 에프엠을 자처하던 내 흰 건반도 따라 울음 울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는데언제였는지 울울한 울타리를 넘나들던 내 노래의 나비들은 어디로들 날아갔는지

 

-졸시안단테 칸타빌레 -내 서정의 편파성2전문

 

사람이 머리와 가슴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이성과 감성만이 사람됨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곤 한다. 어디 한 군데 아파본 사람은 안다. 만병의 뿌리가 머리와 가슴에 있을지라도 골절상을 입어 다리나 팔에 깁스를 해본 사람은 느낀다. 온몸이 사람됨의 전부라는 것을, 부분의 총합이 아니고서는 사람구실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안다.

그래서 건강하다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머리와 가슴이, 이성과 감성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건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통합된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라며 항상 웃기를 권유받는다. 옳은 처방이다. 부정하고 의심하고 외면하기보다는 매사 인정하고 믿으며 받아들이는 것이 삶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은 뻔하다.

그러나 머리는 그렇게 하자고, 언제나 미소를 띠자고, 마음을 열자고, 의심하지 말자고 타이르는데 가슴이 말을 안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마저 긍정 마인드로 일관해야 하는지, 그럴 때 유효한 처방전은 이미 나와 있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즐거워진다!”, 긍정과 부정, 기쁨과 슬픔은 선후의 문제이며, 앞뒤의 순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긍정 마인드로 무장하려 해도 그렇게 따르지 않는 가슴이 문제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낀 북새통의 행사 뒤 불 꺼진 무대를 바라보는 가슴은 쓸쓸이 가을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겨울 눈 내리는 날 설경의 환상보다는 출근길의 내일이 염려를 붙든다.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에 하염없이 젖기보다는 비새는 지붕을 가졌던 삶의 궁핍이 어깨를 움츠러들게 한다. 새봄의 서기에도 썩 물러가지 않는 묵은 겨울의 잔설 같은 노심과 초사가 우리 삶을 주눅 들게 한다.

그래도 이런 우울한 일상들은 시간이 해결해 주고, 공간을 바꿈으로써 얼마든지 긍정 마인드로 바꿀 수 있다. 시간이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방향만 바꾸어도 얼마든지 부정하는 생각을 지우고 긍정하는 정신으로 삶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가슴의 우울도 있다. 모처럼 손에 잡은 소설책을 읽는다. 잘 설정된 캐릭터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 대하여 하지 않아도 좋을 개탄으로 심야의 독자는 잠을 설친다. 사람을 불신하게 한다. 해피엔딩, 사필귀정, 권선징악으로 종결되는 고전소설과 달리 현대소설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나쁜 사람이 승리하기도 하고, 미운 사람이 행복하게도 산다. 마치 현대사회가 그렇다는 듯이.

건전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입에서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정신을 가졌다는 뜻일까? 어쩌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본다. 다루는 내용들이 시사성 있는 사안들이어서 대부분 공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때로는 진행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상스러운 욕설을 남발할 때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한다. 일말의 통쾌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내가 건전한 정신을 갖추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김어준 총수가 교양이 없는 것일까?

그가 교양이 있건 없건, 내가 불건전하건 말건 통쾌함 뒤의 씁쓸함이 우울하다. 원초적 감정으로 욕설을 내뱉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사를 질타하려는 분노와 절망이 변형되어 토로하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양심, 공정과 상식보다 불법적 권력과 불의한 탐욕이 판을 치는 세상을 어찌할 수도 없을 때,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울분으로, 주먹 대신 욕설을 내뱉는 심정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독서를 하거나 뉴스를 시청할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자주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눈물도 그중 하나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할 때가 있다. 픽션에-작가의 계산된 허구에 눈물을 짜다니? 영화를 보면서는 더욱 그렇다. 주인공의 안타까운 종말에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심정이 한숨을 동반한다. 대화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 누군가 자신의 체험담을 실감 있게 이야기할 때면, 그 고달팠던 인생사에 나의 고생담이 더해 남 몰래 눈시울을 적신다.

에프엠 음악라디오 프로그램을 늘 끼고 산다. 밥 먹을 때나, 잡일을 할 때나, 읽을거리를 앞에 두거나, 심지어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에프엠 클래식음악은 내 삶의 BGM[Back Ground Music: 배경음악]이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일에 몰입하다 보면 음악소리가 전혀 방해되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음악이 가깝게 들려 새로운 발상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한번은 아침 시간에 예의 에프엠 클래식 음악을 듣는데 신청자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마음에 병이 생겨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자기소개와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신청하였다. 전에도 더러 이 곡을 CD로 듣기는 하였지만, 이 날의 음악은 달랐다. 곡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도 모르게 참 아름답구나!’하는 감탄과 함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아침체조를 멈추고 이 곡이 끝날 때까지 음악을 감상하였다.

정신이 고장 나면 머리만 살필 것이 아니라, 몸을 살펴야 한다. 밥 잘 먹고, 운동 잘하고, 잠 잘 자는 것만으로도 헐거워진 마음의 문틈을 조일 수 있다. 하긴 이것을 잘한 사람의 마음 문이 고장이 나겠는가마는? 그래도 울적하고 심란할 때마다 음악을 벗 삼았던 체험적 동질감이 아침 한때나마 나를 치유했던 것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