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사람, 끈과 띠로 이어져 있다
세계와 사람, 끈과 띠로 이어져 있다
  • 김규원
  • 승인 2023.02.27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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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想隨想-9

 

 

저 강물에 On하며 가는 날

이 산들을 Off하고 문 닫는 날

 

낚시친구가 간암발병 서너 달 만에

강을 건넜다, 어제 떠났다

승화원 화장장 운구시간표를 보면서

오늘 착각을 끊다, 낚싯줄 끊기다

 

소멸의 원형에 나를 소신하노라면

어깨를 두드리는 따끔 노크!

강을 건너간 이들의 타전이 왔다

 

내 안의 스위치는, 언제까지나

자를 것 자를 수 없는 강으로

끊을 것 끊어낼 수 산맥으로

절연상태인 채 온전할 수 있을까

 

-졸시유대紐帶전문

친지의 갑작스런 운명에 마음이 울적하다. 하긴 고래희의 중반에 이르렀으니 갑자기가 온당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백세시대라 하지 않는가. 그런 시대의 추세를 감안하면 갑작스런 석별이 맞다. 그것도 그때까지 건강하게 일상을 유지하다 발병 서너 달 만에 떠났으니 남겨진 가족 친지들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놀람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한 편에서는 평안한 죽음이라는 조심스러운 감상이 따른다. 마지막 가는 길에 평안한 죽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평안은 가는 자의 것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의 몫이 그렇다는 것일까. 자식들의 간병을 받을 수 없는 세태로 볼 때, 병원 신세를 지거나, 요양원에서 또 몇 년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다행스러운 떠남이라는 것이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그렇게 감상을 발설할 일도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돌이킬 수 없는 단 한 번의 석별이기 때문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卽問卽說에서는 이런 처방도 있다. 부모가 이른 연세에 급서하게 되면 남겨진 가족들이 비탄에 빠져 애통해 하지 않겠는가. 그리되면 이승의 미련을 벗어버리고 저승으로 훌쩍 건너가야 할 부모의 영가[靈駕: 죽은 사람의 넋]이 떠나지 못하고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닌, 중음[中陰 혹은 中溫, 中有라고도 함]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부모가 한 삼년 병석에 누워 자식들의 간병을 받는다면, 부모의 영가가 편안히 저승으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삼 년, 혹은 그보다도 더 오랜 시간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의 똥오줌을 받아내며 병수발을 들다보면 자식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고, 저리 고생하시느니, 제발 빨리 저승으로 가시지이렇게 되면 영가는 더 이상 중간에 머물며 방황하지 않고 미련 없이 저승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죽음이든 마주하게 되면 다음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떠올리며 몸서리치며 두려워하거나, 다른 하나는 그저 올 것이라면 언제든지 오겠지허심탄회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바라보는 경우다. 적어도 전자의 경우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죽음이 두려워 전전긍긍하거나, 미련을 놓지 못해서 안달복달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수련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은 짐작한다.

그런 길의 하나를 시문학에서 찾았다면 행운일 수 있다. 시는 언제나 나의 마음[생각]에서 출발하고, 나의 삶[체험]을 변주해내며, 나의 시간[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성찰의 결과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는 철학이 관념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언제나 현실[실천적 삶]에서 찾아낸다. 그것도 생각[정신]과 느낌[감성]이 미학적으로 융합된 상태로 말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의 논의들이 해결할 수 없는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시문학이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인식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존재론]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가치론] 다양하고 깊이 있는 탐구로도 끝내 알아낼 수 없는 근본적 질문에 대하여 시문학은 삶[체험]의 언어로 형상화하여 답을 만들어 낸다.

세계는 끈으로 이어져 있고, 띠로 묶여 있다. 이 끈과 띠는 세계와 인간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묶어놓기도 한다. 인연설을 끌어오지 않아도, 조물주의 탄생설화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그렇다. 이 끈과 띠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을 밀고 나가면, ‘우리 삶자체가 이 끈과 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럴싸한 마음이든, 마뜩치 않은 생각이든, 달콤하거나 섬뜩한 느낌이든, 한 번 심연에 물결을 일으키는 것들은 끊어내고, 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단단하게 조여 오기만 한다.

죽음에 대한 반응도 그 중 하나다. 타인의 죽음이든, 나의 죽음이든 죽음이란 우리를 이어주고 묶어주던 끈과 띠가 끊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인가? 스위치를 On하거나 Off하면 전기가 이어지고 끊기는 것처럼, 컴퓨터의 스위치를 On하거나 Off하면 세계를 접속하는 인터넷 그물망이 연결되거나 단절되는 것처럼 그리 되는 것인가?

아무리 골몰해 봐도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생각[마음] 자체가 소멸되는 시기-‘나의 죽음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탄생 자체가 바로 끈과 띠에 연결되는 행위이며, [] 자체가 바로 끈과 띠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사람은 이 끈과 띠로 이어져 있는 상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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