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마실길에서
서해 마실길에서
  • 김규원
  • 승인 2023.01.1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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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백 금 종/수필가
백 금 종/수필가

마실길 3길을 걷는다. 성천항에서 격포항까지 해안 따라 펼쳐진 9km의 길이다. 바다와 산이 맞물려 빚어놓은 길이기에 들머리부터 예사 길이 아니다. 걸어서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길 위에 서니 작은 조바심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길을 걷는 것은 귀소 본능과 같은 것 일게다. 그리움을 향한 동경의 열정일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길을 나서면 설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자연의 소리에 귀가 트이고 그 몸짓에 눈이 열리게 된다.

 

숨이 조금 거칠어지고 땀방울이 등 줄기에 송골송골 맺힐 때 벼룻길이 나타났다. 벼랑에 걸쳐놓은 듯 가파르고 험하다. 발을 삐끗하면 금방이라도 바닷속으로 풍덩 빠질 것 같다. 이 길을 만들기 위해 자연은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길 아래에는 서해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수평선에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밀려와 바위에 부디 칠 때마다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밀려났다. 만약 길 위까지 넘쳐 오른다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텐데 낮은 곳으로 돌아가는 겸손함 때문에 겨우 나아갈 수 있다. 자연에도 저런 겸손함 있기에 세상은 아귀가 맞추어지며 하루하루 평온하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길은 걷기만이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길 위에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훈훈한 인심을 만날 수 있다. 믿음직한 동행이 있고 홀로 삼키는 고독도 있다. 사랑의 세레나데가 울려 퍼지는가 하면 이별의 눈물 자국이 있다. 미지에 대한 설렘도 있다.

 

병풍처럼 둘러선 산 위에는 잎새들이 자신을 태우고 있다. 산은 물을 굽어보며 색색이 치장하고 물은 아름다운 산을 위해 출렁이며 한 폭의 산수화를 완성해 가고 있다. 산과 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난 자드락길을 자박자박 걷는 나. 어울리는 자연의 한 풍광 아닌가?

 

다시 길을 재촉한다. 산비탈 기슭에 외줄기처럼 난 길이다. 내변산 자락이 험준함을 무언으로 말해준다.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가지가지 고비를 넘겨야 했듯 험한 벼룻길도 호젓한 오솔길도 넘어야만 길을 걷는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만약 평탄한 길만 이어진다면 풀어진 국수처럼 그 진미가 반감될 것이다. 인생에서도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라는 말이 있다. 길을 걷다 보니 길이 인생 같고 인생이 길 같다는 생각이다.

 

세찬 파도 위로 날아가는 갈매기 한 마리 그도 살길을 찾고 있는 듯하다. 먹이를 찾아 종일 날갯짓하며 가족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절박한 일. 삶의 여정에 선 갈매기가 마치 내 젊은 날 무거운 짐을 지고 생활 전선에서 허덕였던 모습과 닮아 아릿한 마음이 갈매기로 향했다.

 

네가 지나온 인생길은 어떠했을까? 선택의 갈림길 위에 서서 고뇌했던 내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삶의 벼랑길에서 터벅터벅 걷는 후줄근한 사내가 내 모습이었다. 바람 부는 벌판을 질주해 본 적 없고 하늘 향해 뛰어오르려는 호기도 없이 그냥저냥 살아온 나그네였다. 스스로 길을 만들지 못하고 남들이 다져놓은 길만 걸으려 했던 나약한 인생이었다. 빈 계절로 가는 길목에서 모든 것 털고 구르는 낙엽의 가벼움이 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한다. 인생도 낙엽 지듯 세월 앞에 어김없이 지고 말 것을.

 

이제부터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욕 안 먹는 노을빛 닮은 길이 될까? 항상 곧게 뻗은 큰길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 눈보라 휘날리는 길도, 비바람 몰아치는 길도 있을 것이다. 굽어 돌고 오르막내리막 길도 있지 싶다. 그때마다 중심을 바로 잡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늘품이야 없다 하지만 몸을 단정히 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작은 것이라도 베풀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사념에 젖어 망연해지려는 순간 들국화 무리가 발 앞에 나타났다. 생의 마무리 단계에서도 환하게 웃고 있는 꽃 몇 송이. 할퀴고 씻기고 밟히면서도 생명을 지키며 오늘에 이르렀겠지. 삶은 이렇게 사는 거야. 나도 너같이 치열하게 인생길을 걸었다면 오늘보다는 더 화사한 모습이겠지. 아니 향기도 더욱 짙어졌을지 몰라. 꽃 심에 반하고 그 향기에 취해 나직이 눈을 맞출 때 서해의 반쪽 하늘에는 노을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모든 것 미련 없이 태워버리는 저 장엄함. 마침표를 찍어야 할 이 길이 내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인 듯하다.

 

나도 언제쯤 저 노을처럼 길지 않은 여생을 멋지게 태울 수 있을까? 작은 설렘이라도 기대하며 나섰던 이 길이 결국 너에게로 향하는 길이 되었다.

 

그 노을 속으로 하루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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