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행복
하얀 행복
  • 김규원
  • 승인 2023.01.05 1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광섭/수필가
문광섭/수필가

며칠 전, 출판사를 다녀오는데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젊은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법석을 떨었다. 나 역시 나이도 잊은 채 덩달아 흥분했다.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차량 사이로 온 하늘이 온통 하얗게 피었다. 눈꽃을 처음 보는 사람인양 넋을 잃고 있다가, 타고 갈 버스가 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젯밤에도 함박눈이 내렸다. 밤새 내렸는지 온 세상이 하얗다. 몇 년 동안 제대로 눈 구경을 못했는데, 올겨울은 날마다 눈이 내린다. 더구나 한파까지 겹쳐 진짜 겨울 같은 느낌이다. 이 추운 겨울에도 막일을 해야 먹고 사는 사람들에겐 배부른 소리고, 철따구니 없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새하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책 한 권 내느라 두 달 가까이 시달렸던 불안과 초조감이 눈 속에 파묻히는 시원함에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봄부터 별렀으나 가슴 아픈 일을 핑계 삼아 미루다가 가을에 들어서는 시간에 쫓겼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했지만, 60여 년을 가까이 모셨던 담임선생님은 3월에, 40여 년 스카우트 동지와 의형제로 지내던 형은 6월에, 30여 년을 직장에서 함께 보낸 친구는 11월에, 내 오른팔처럼 여기던 후배 또한 갑작스레 떠나보내는 안타까움으로 도무지 일손이 잡히질 않아서였다. 거기다 게으름도 한 몫을 보탰다.

도시에 살면서 이렇게 많이 눈이 내린 걸 보자니, 시골인 장수가 고향인 나로선 마치 고향 집에라도 온양 포근한 마음이 든다. 어릴 적 눈이 내리면 개를 데리고 백화산 자락을 휘돌며 뒹굴었다. 옷이 젖어서 명태가 돼 집에 가면, 분명 할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판인데도 그렇게 좋았다.

어머니한테도 공부는 않고 어딜 그렇게 싸다니느냐고 혼날 게 뻔한 데도 몸이 근질거려 못 견뎠다. 하여 눈이 오는 날엔 부쩍 어머니 생각으로 잠들지 못한다. 할아버지께서 섣달그믐에 돌아가셨기에 3년의 상례(喪禮)가 한겨울 눈 속에다 명절과 함께 겹치니, 무척이나 힘들어하신 걸 기억하고 있어서다. 창밖에 내리는 눈발 속으로 옛 추억이 아련하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생겼고, 자동차가 흔해 40여 분이면 고향 집에 다다른다. 60여 년 전엔 두 시간이 넘게 걸렸으며, 그마저도 하루 세 차례밖에 없었다. 더구나 산간 지역이라 눈이 오면 허벅지 넘게 쌓여서 자동차가 끊겼다. 교통이 불편한 대신 토끼몰이, 눈썰매, 스케이트 타기 등 겨울철에 즐기는 놀이로 유년 시절을 즐겁게 보냈다. 흔한 장작불이 삭아 나온 숯불에 구운 군고구마는 겨울철의 별미였다. 처마 끝에 매달려 하얀 서릿발 쓴 곶감도 항상 군침 도는 간식으로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입맛을 돋우었다.

아침나절, 한 시간이 넘도록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속에 머물다가 기어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건지산 허리 자락이라도 밟고 돌아와야만 숨통이 트이고, 기쁨이 두 배나 될 것 같아서다.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눈길엔 나보다 앞선 사람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엊그제 내렸던 눈이 녹다가 얼고 또다시 눈이 내려서인지 음지는 미끄러워서 조심스러웠다.

내 주위엔 화장실이나 계단에서 넘어져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즐겁고 신이 났다. 두 차례 10년 가까이 병치레와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이처럼 눈길을 걷는다는 게 놀랍지 아니한가! 더구나 그 시절엔 장수하셨다는 할아버지(70)와 어머니(80) 나이를 넘겨 눈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기쁨이 넘친다. 그때 손전화기가 울어서 꺼내 보니, 얼마 전 군대에서 제대한 큰손자였다.

할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지금 갈까요?”

잠시 밖에 나왔으니, 30분 뒤에 오거라!”

컴퓨터가 말을 듣질 않아서 불러 놓은 터였다. 가슴이 뿌듯해 온다. 무사히 병역 의무를 마쳐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이 녀석이 대학 갈 때까지 만이라도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치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6년이 지났으니 어찌 아니 행복하겠는가! 가던 길 돌아서며 하얀 행복을 가슴 가득 크게 심호흡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