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 없듯이…”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 없듯이…”
  • 김규원
  • 승인 2022.12.26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좋은 시-89

 

, 이번 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中古品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에 담긴

30여 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황지우(52~.전남 해남)거울에 비친 괘종시계전문

 

 이 시를 생각하면서[느낌이 아니라 생각이라고 했다], 먼저 떠오른 것은 거울에 대한 나름의 선험적 판단이었다. 사람은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흔히 생각하거나, 느끼게 된다. 생각은 사유하고 사색하는 이성의 편이고, 느낌은 오감을 통한 감각기관의 자극을 말한다. 앞의 것은 머리로 하고, 뒤의 것은 가슴으로 한다고 여기지만, 결국은 느낌이 먼저이고 이에 따라서 생각이 온다는 것은 경험칙으로 알 만하다.

 

감정의 산물이라는 시[예술]작품을 대하면서 느낌보다는 생각이 앞선다고 말하는 나부터 이 시의 의도에 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울이 지닌 다양한 의미망 혹은 함축된 의미들이 포함하고 있을 상징성과 은유된 맥락을 떠올릴 때 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지배하였다. 이 시가 그것을 강요하는 듯이 보였다.

 

거울=교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우리는 다른 대상의 훌륭한 점을 본받는 것을 귀감龜鑑을 삼는다고 한다. 이 말에 쓰이는 [거북] 역시 거울의 뜻이 있다. 옛날 거북의 등을 불에 구워서 그것이 갈라지는 균열 상태를 보고 길흉을 점쳤다는 뜻에서, [거울]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려고 세숫대야에 물을 떠 놓고 모습을 비추어보는 것을 가리키는 뜻에서, 이 두 말들은 모두 거울의 의미가 있다.

 

제목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에서 이미 드러난 거울은 위에서 밝힌 자신의 됨됨이를 비춰보는 도구라는 숨긴 뜻을, ‘괘종시계는 글자 그대로 오후 2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경고음을 은유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오후 2를 거울에 비춰보니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각을 가리키니, 시적 화자에게 남은 시간이 참 각박하다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거울에 내 인생을 비춰보니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이제 볼 장 거의 다 본 셈[, 이번 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인데, 그런 시적 화자에게 시적 대상[아내]는 줄기차게 소위 교훈[잔소리]를 해댄다.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잔소리[교훈질: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를 해대는 것이다. 이럴 때 그런다. 순종적인 사람은 옳은 말에 순응하며 자신을 고치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친 인생에서 무엇을 고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을 때, 지겨운 교훈 질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이 선택할 길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아주 무력한 것은 아니다. “2 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 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는 사실을 시적 화자는 잘 알고 있다. 30여 평의 초라한 삶-내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답답한 세상-서가에는 아직도 시적 화자보다 더 못 가진 자들을 위하여 살라는, 사람다운 삶의 세상을 만들라는 책들[마르크시즘]이 꽂혀 있는데, 그저 가스 밸브를 생각하며, 15층 베란다를 염두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시적 화자의 속은 석유스토브 위 주전자에서 푹푹 끓고 있는 물처럼, 뜨거운 한숨만 내쉬고 있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인 듯하다. 누가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 듯도 하다. 아하, 결국 시문학은 우리네 삶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 아니던가! ‘느낌이 아니라, ‘생각해 보니 그럴 듯도 하다.

 

2022년이 저물어간다. 새해나 묵은해나 그게 그거겠지만 2022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절망이다. 누구에게? 바로 2022년을 살았던 우리가 그렇다. 그래서 그런다. 돌이킬 수 없어 더욱 절망스러운 세밑이 마치 세기말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꼴 같지도 않는 자들, 사람다움을 저버린 자들, 대다수의 생명권보다 극소수의 욕망에 기름을 붓는 자들, 사적 권력욕을 공적 대의명분으로 회칠하는 자들의 부림을 받느니, 차라리 가스 밸브를 열어두고 싶고, 15층 아래를 내려다보게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괘종시계에 비친 내 모습이 빈약하기만 하다. 오후 두 시만 됐어도 어떻게 해보겠다. 내 안의 괘종시계가 늦은 일곱 번을 친 지도 한참 지나고 보니 그저 망막한 심정으로 또 다른 거울을 본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볼 수 없듯이, 제 생각[마음]으로 제 마음[생각]을 볼 수 없다-[心不見心: 대승기신론]”는 가르침에 기대어, 가스 밸브와 15층 아래를 내려다보는 발길을 우선 잡아두고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