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인생의 꽃 튀기는 사랑전쟁”
“흙수저 인생의 꽃 튀기는 사랑전쟁”
  • 김규원
  • 승인 2022.12.19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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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88회

 

슬레이트 처마끝에서

빗방울이 뚝 또 뚝 떨어지구요

창에 기울은 오동꽃이 덩달아 지네요

종일 추녀물에 마당 파이는 소리

나는 차배달 왔다가 아저씨와

화투를 치는데요.

아저씨 화투는 건성이고

내 짧은 치마만 쳐다보네요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

나는 시큰둥 풍약이나 하구요

창밖을 힐끗 보면

오동꽃이 또 하나 떨어지네요

집 생각이 나구요

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

비단과 금침과 황금지붕을

생각하는데

비는 종일

스레이트 지붕에 시끄럽구요

팔광을 기다리는데

흑싸리가 기울어 울고 있구요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쉬네요

이매조가 님이라는 건 믿을 수가 없구요

아저씨는 늙은 건달이구요

나는 발랑 까진 아가씨구요

한심한 빗소리는 종일 그치지를 않구요

 

-최정례(1955~.경기 화성)화투花鬪전문

 

나는 이 시가 좋다. 왜 좋은가, 그것을 곰곰 생각해 보기 전에, 단숨에 읽으니 그냥좋았다. 물론 이 그냥이란 말이 말 그대로 그냥은 아니겠지만 여러 가지 소위 좋은 문학-좋은 시들이 갖추어야 한다고 뇌에 새겨진 점검 항목들을 거치기 전에 우선 읽는 감성 그대로 좋았다는 것이다.

좋았다는 느낌과 동시에 온 감정은 조금은 통속적이라 오해를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문학을, 시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기우일 터이니 외면하기로 한다. 통속적이지 않고 인간의 감정이 순수한 상태로 드러나거나 머물 수 있을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통속적이라는 오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기우는 글자 그대로 기우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이 시가 나에게 왜 좋은 감성을 불러일으켰을까를 이제야 몇 가지 이유를 건져 보는 것이다우선 제목 화투-꽃들의 싸움이 참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에도 그것이 그리 볼썽사납지 않다는 것이다.

봄비가 됐건, 여름 장맛비가 됐건 이렇게 ‘[비가]종일 추녀물이 마당 파이는 소리를 내며 내리는 날이면 그저 방문 닫아걸고 화투싸움이 제격이다. 그런 날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그런 날에 나를 맡기고 그저 통속적으로 놀아볼 수 있는 날들이 몇 날이나 있을까? 그런 여유와 한없이 통속적으로 나를 떨어뜨릴수 있는 날들이 있긴 있어야 한다.

인생이 성공만 하고, 인생이 진지하기만 해서 어떤 인생을 꽃피우고자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궁색한 사람은 이 시를 찬찬히 감상해 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꽃도 떨어지면서 피지 않던가! 오동꽃, 그 대책 없이 미련퉁이 닮은 꽃도 비에 젖어 저렇게 하염없이 덩달아지고 있다 했다. 비와 싸우면서, 계절이 내리는 시간의 추적거림에 맞서면서 오동꽃은 저렇게 지면서 오동이 되는 것이다.

오동꽃 닮은 또 하나의 꽃이 있다. ‘차 배달 왔다가 [차를 시킨]아저씨꽃싸움-화투를 치는 꽃이 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청단이고 홍단이고/ 다 내주지만이 아가씨는 시큰둥 풍약이나 한다고 했다. 아가씨의 청홍꽃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는 아저씨와 그러거나 말거나 시큰둥 풍약이나 하고 있는 아가씨와 벌이는 꽃싸움이 볼만하다. 그럴 때마다 오동꽃은 또 하나 떨어지며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갈 뿐이다.

그러고 보면 아가씨 꽃을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는 아저씨의 전투나, 시큰둥 풍약에 관심을 가진 아가씨나 모두가 금수저[육목단을 가져오다/ 먼 날의 왕비]는 아니고, ‘흑싸리신세의 흙수저임은 분명해 보인다. 흙수저들끼리 봄비에 오동꽃 지는 날 통속적인 꽃싸움을 벌인다.

그 전투의 도구들이 열두 달을 상징한 화투짝 48장이 전부이겠지만, 이것만큼 서민들의 꽃싸움을 적나라하게 은유하는 전쟁 도구가 또 있을까? 사소한 찻값 내기 꽃싸움이 패가망신의 노름으로만 번지지 않는다면, 봄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날의 꽃싸움으로 이만한 인생의 통속적 놀이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고 보니 정작 이 시를 읽으면 좋다고 느꼈던 중요한 한 대목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 감칠맛 나는 리듬감, 거침없고 삐침 없는 진술의 힘, 주저하고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가는 상황 전개, 그리고 전통 가요풍의 노랫말이 풍기는 친근감 등이었다. 도무지 주지적 시도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전혀 흙수저 인생-막장 인생도 오지랖 넓게 끌어안으면서 불러 젖히는 가객의 멋들어짐이 읽는 이를 매혹시킨다.

메타포는 메타포대로 은유하면서,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형상하면서, 노랫가락의 흥청거림은 또 그대로 유지해 내는 노래의 힘은 바로 꾸미지 않으면서 꾸며내는’-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자연미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 그러고 보면 나 또한 흙수저 인생으로 또 다른 흙수저 인생을 얼마나 짠한 심정으로 끌어안으며 살아왔던가? 아니면 끊임없이 금수저 인생을 지향하며 하릴없이 오동꽃 지는 세월을 외면하며 살아왔던가? 이 시는 읽는 이의 마음 안에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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