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할아버지
무정한 할아버지
  • 김규원
  • 승인 2022.12.1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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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규 풍/수필가
최 규 풍/수필가

  어린 손자가 새벽에 내려와서 어젯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단다.

아파요. 오늘 학교 쉴래요.”

어릴 때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커서 고생해. 아파도 참고 가야지. 관운장은 바둑을 뒤며 화살 독에 썩은 살을 깎아도 참았단다.”

그건 이야기잖아요.”

  눈물을 흘리면서 아프다고 했다. 밥을 안 먹어도 달래어 학교를 억지로 보냈다.

전화가 왔다. 손녀다.

건희가 아파서 보건실에 누워 있어요. 학교급식도 못 먹어요.”

그래? 끝나면 학원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해.”

  손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쓰러질 듯이 돌아왔다. 소아청소년과에 데리고 갔다.

여느 때 같으면 나란히 걸으며 내 손을 잡았는데 그냥 뒤따라온다. 말을 걸어도 고개만 흔든다.

여자 원장이 배와 등과 입과 귀를 살폈다.

손자가 심하네요. 중이염이에요, 우측 귀가 시커멓잖아요? 후두염이에요. 열은 아직 없지만, 밤에 나면 내일 코로나 검사하러 오세요. 3월에 치렀으니 여섯 달이 넘어서 걸릴 가능성이 크네요.”

너희 반에 걸린 학생이 있니?”

없어요.”

  약국에 들어갔다. 인사를 상냥하게 잘하는 데 고개만 숙였다. 목이 아프니 말을 안 했다. 손자가 바짓가랑이를 끌어올리고 무릎을 보여준다.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왜 이렇게 시퍼래?”

“2층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떨어졌어요. 쇠판에 부딪혔어요.”

몸이 아프고 정신이 흐려서 발을 헛디딘 것이다.

아침에 다쳤다고 말하지, 왜 안 했어?”

할아버지가 야단칠까 무서워서요.”

아무 때나 야단치던? 아프다고 말했어야지.”

약사한테 보여주고 물었다.

정형외과에 데리고 가세요. 뼈가 잘못되었을 수 있어요.”

우선 집에서 지켜볼 테니 연고가 있으면 주세요.”

 

  집으로 와서 연고를 발라주었다. 억지로 몇 수저 밥을 먹이고 약을 먹게 했다.

  “할머니, 저 오늘 밤에 할머니 방에서 자면 안 돼요?” 아내가 그러란다. 아침에 아파도 참고 등교하라고 함께 재촉했다. 오후에 돌아오면 소아·청소년과에 데리고 갈 테니 학교부터 가라고 했다. 감기약이 있어서 한 알 먹여서 보냈다. 이렇게 심한 줄도 모르고 떼쓰는 줄로 오해했다.

  쌍둥이는 아침과 저녁밥을 할머니한테 얻어먹는다. 태어나면서 엄마를 잃어 인큐베이터 안의 핏덩이 둘을 안고 와서 여태껏 부모 대역을 했다. 잠을 설치면서 안고 자고, 분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키워서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보냈다. 쌍둥이가 몰라보게 자란 십 년간에 나와 아내는 훌쩍 늙어버렸다. 애들 아빠는 새벽에 나가 밤에 퇴근하니 시간이 없다. 부모 역할이 우리 차지다. 내 환갑부터 12년째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가고 잠을 깨워서 밥 먹이고 생수, 마스크 챙겨서 등교시킨다.

  그동안 아이들을 키우느라 힘은 들었어도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 기특하고 흡족하다. 애들도 우리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은 손자한테 잘못했다. 아픈 것을 가볍게 알고 억지로 학교에 보냈다. 결석시키고 소아·청소년과에 다녀와서 쉬게 했어야 맞다. 중이염에, 후두염에 아프다고 호소하는 아이를 무모하게 등교시켰으니 내 죄가 크다. 양호실에 누워서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엄마가 안아주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으니 상실감이 클 것이다. 더구나 지금이 사춘기다. 목소리가 변하여 변성기다. 예민할 나이다.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받아주어야 한다. 어미 없이 컸으니 얼마나 가련한가. 자비도 없이 무심했다. 얼마나 아픈지 살피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

  "그래, 얼마나 아프니? 오늘은 가지 말고 푹 쉬거라. 안정이 첫째야. 병원에 다녀오고 집에서 쉬자."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손자를 이해하려는 마음도, 따뜻한 사랑도 부족했다. 손자의 아픔을 안아주지 않고 요구를 뿌리쳤다.

  나는 늦게 태어나서 조부모 사랑을 받지 못했다. 외조부도 못 뵈었다. 할아버지를 부르는 친구가 몹시 부러웠다. 할아버지에게 손자는 금동이 옥동이다. 꽃처럼 사랑스럽다. 자비심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나는 오늘 손자에게 무정한 할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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