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 이삭 한 송이
수수 이삭 한 송이
  • 김규원
  • 승인 2022.12.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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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 만/수필가
이 용 만/수필가

내 방 한쪽에 수수 한 송이가 벽에 걸려 있다.

대부분 수수 이삭이 되었던 조 이삭이 되었던 한 송이만 걸어놓지는 않는다. 몇 송이 덩이로 벽에 걸어놓는다. 최소한 두 송이 정도는 짝을 이루어 걸어놓는다. 그런데 달랑 한 송이만 걸어 놓은 데는 까닭이 있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오곡백과가 튼실하게 익어가고 있던 지난 10월 어느 날, 문득 고향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일어 나들이를 나섰다. 고향의 들판은 말 그대로 누렇게 익은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가을 들판을 대표하는 것은 벼를 따라올 자가 없다.

그러나 밭은 다르다. 오만가지 곡식들이 다 들어서 있는 밭에서는 내가 왕이라고 큰소리를 칠 자가 누구일까? 콩도 있고, 팥도 있고, 수수와 조도 있다. 깨도 율무도 한몫 끼워달라고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을철의 밭곡식을 대표하는 것은 수수가 아닐까 한다. 여름부터 밭 가운데 우뚝 서 있던 수수는 가을이 오면 탐스럽게 익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그 자태는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다기보다는 보란 듯이 다른 곡식들을 굽어보고 있는 자태다. ‘알알이 익은 곡식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가장 좋은 곡식은 역시 수수다. 콩이나 팥에는 어울리지 않고, 벼 이삭으로서도 약하다. 조가 있기는 하지만 낮게 드리워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수수는 밭 가운데든 밭머리든 어디에서나 버티고 서서 하늘을 머리에 인 채 사방을 굽어보고 서 있다.

 

황정지 고개를 넘어 어려서부터 늘 다니던 밭으로 갔다. 먼 곳에서 보아도 잘 익은 수수가 밭의 주인인 양 서 있다. 그 아래로 콩도 있고 팥도 있고 조이삭도 보인다. 무심결에 밭으로 들어서면서 역시 가을 밭곡식을 대표하는 것은 수수만 한 것이 없겠다 싶었다. 저 잘 익은 수수 이삭을 몇 개 꺾어다가 집안을 온통 가을 풍경으로 장식하리라 생각하고 수수 이삭에 손을 대고 한 송이를 꺾었다. 그 순간 짜릿하게 다가서는 통증이 있었다.

내 정신 좀 봐라. 이 수수는 내 것이 아니다. 이제 이 밭은 내 것이로되 밭에서 나는 곡식은 내 것이 아니다. 남에게 세를 놓았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수수 이삭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얼떨결에 꺾은 한 송이는 버릴 수 없으니 그냥 들고나왔지만 더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 살아 계실 때에는 우리 밭의 모든 곡식이 다 내 것이었다. 수수 이삭이든 조 이삭이든 무엇이든지 내 맘대로 꺾어가도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었다. 덩그렇게 남아 있는 고향 집마저도 썰렁하게 온기가 가셔서 내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잡풀이 우거진 마당은 그런대로 들어설 수가 있다 하지만 먼지가 수북한 마루에는 올라설 수가 없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에는 사립문 밖에서부터 발걸음이 빨라졌고 마당에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면 한밤중에라도 온 집안이 환하게 불이 밝혀졌는데 어머니 안 계신 우리 집은 아무것도 반응을 보인 것이 없었다. 아버지 살아 계시지 않은 논은 벼들이 노랗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내 것이 아니었고 어머니 살아 계시지 않은 밭은 오곡백과가 다 익어 있어도 내 것이 아니었다. 가을을 다 담고 있을 것 같은 탐스럽게 잘 익은 수수 이삭도 내 것이 아니요, 밭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콩잎 하나도 내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내 곁을 떠나버린 가을 들판에 서서 나는 가을 하늘이 한없이 높고 푸른 하늘만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어머니 아버지 살아 계시지 않은 고향은 제대로의 고향이 아니요, 그분들이 계시지 않은 논밭은 제대로 내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도 한 송이 꺾어온 수수 이삭에는 나의 가을이 깃들어 있다. 어쩌다 무심코 꺾어온 저 수수 이삭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 될 줄은 몰랐다. 바라볼 때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뿜어내는 수수 이삭 속에는 나의 가을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나의 고향 들판과 어린 시절과 우리 가족들이 들어 있다. 내 또래 친구들이 들어 있고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던 이웃 사람들도 들어 있다. 멀리 떠난 사람들의 얼굴도 들어 있고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들어 있다.

한 송이의 수수 이삭, 그것이 나의 기념물이 되었던 올해는 참 소중한 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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