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장엄한 시정신의 행진!”
“촛불, 장엄한 시정신의 행진!”
  • 김규원
  • 승인 2022.12.05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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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좋은 삶-86

 

 

새벽촛불이 제 몸을 숫돌 삼아 빛을 갈고 있다 뇌천을 마모시켜 만든 확 하나 이고, 천상에서 정화수 긷고 있다 정화수 한 사발 내려놓는 가장 완전한 치성은 목욕재계한 자신을 번제(燔祭)하여 바치는 일이었으므로 주위를 비춰 본성을 감춘 죄, 제 갈아낸 서슬로 제 멱을 딴다 연기가 유필遺筆하는 상형문자들, 여백이 된 길 더듬어 돌아가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유서를 쓰는 가장 긴 삶을 읽는다 하늘이 바람을 시켜 천기누설을 지운다 탯줄 묶는 어머니 손을 설핏 보았으나, 제단 위 태한 더미만 화석처럼 굳고 있다

 

-차주일(1961~. 전북 무주)새벽촛불전문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는 시를 읽는 첫걸음이다. 일상적인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사물의 감추어진 면을 찾아내는 것도 시를 읽는 지름길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시인은 사물의 모습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비틀어 읽기도 하며, 처음인 듯 낯설게 보기도 한다. 그랬을 때 우리 의식을 두텁게 덮고 있는 타성의 눈꺼풀을 벗겨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그런 진면목을 발견하는 일은 즐거움이다. 우리가 흔히 별다른 분별없이 촛불이라고 부르지만, 촛불은 +불꽃+불타 사라지는 연기+[열기에 녹은 상태]촛농+[다 타지 못하고 흘러내려 굳은]촛농+[여러 작용으로 발하는]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촛불이라고 부르지만, 이 촛불에는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참여하여 의식의 미감에 새로운 느낌을 전해준다.

  그러면 과연 촛불이라는 사물이 그의 이름[] 안에 얼마나 많은 미덕을 담고 있는지, 시인의 시 정신이 빛을 발하는 안목을 따라가 본다.

  첫째 눈에 띄는 것은 새벽촛불이다. 그냥 촛불이 아니다. 제 몸을 숫돌 삼아 빛을 갈고 있는 촛불이다. 숫돌은 쇠붙이로 된 연장-이를테면 칼이나 낫, 가위나 대팻날 등속을 날카롭게 벼리는 도구다. 그럴 때 쇠붙이는 날카롭게 날이 세워지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숫돌 역시 제 몸을 갉아내야 한다. 제 몸을 헐어서 날을 세우는 숫돌, 제 몸을 태워서 빛을 내는 촛불, 이는 바로 자기희생을 통해서 진리를 간구하는 수행자의 기도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이다.

  두 번째로 눈길이 가는 대목은 이다. 확은 방아확이다. 절구의 아가리부터 깊이 들어간 구덩이 부분을 확이라고 한다. 촛불이 빛을 내기 위해서는 고체 덩어리 초를 녹여내야 가능하다. 불길에 녹은 초는 액체 상태가 된다. 그 액체가 바로 뇌천腦天을 마모시켜 얻은 정화수라 한다. 뇌천은 머리 윗부분에 숫구멍이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신생아들의 머리를 보면 이 뇌천이 아직 굳지 않아 아기의 들숨 날숨을 따라 뇌천 역시 함께 들랑날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절묘한 발견이요, 비유다. 확에 고인 촛농이 얼마나 투명하던가! 치성을 드리는 자의 [목욕재계한] 신심인 것이다. 그래서 정화수다.

  그렇게 해서 촛불은 비로소 빛을 낸다. 그러므로 빛을 내는 일은 자신을 번제燔祭로 바치는 일이다. 자기 몸을 태워서 하늘에 바치는[燒身供養] 일이다. 그런 자기희생이 죄가 될 줄이야!!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다. 주위를 비춰 자신의 본성을 감춘 죄가 하나고,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멱을 딴] 죄가 둘이다. 시가 가장 즐겨 쓰는 어법, 반어와 역설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세 번째로 주목에 값하는 대목이 바로 촛불이 스스로 유서[遺筆]을 쓴다는 데 있다. 촛불은 한 치도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의 형상이다. 붓은 먹을 묻혀 종이에 글씨를 쓰지만, 촛불[]은 연기로 텅 빈 공중에 글씨를 쓴다. 그것도 상형문자로 유서를 쓴다. 붓은 먹물을 입은 몸으로 천년을 가며 인간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촛불은 공중에 상형문자를 쓰지만 바람을 빌려 천기를 지우고 만다.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대목은 어머니의 탯줄이다. 한 자루 촛불이 타고 남은 초의 그루터기는 빛이 태어난 탯자리다. 촛불은 단순한 사물에서 새벽이 덧붙여지며, 자식을 위해 어둑새벽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의 형상과 완벽하게 중첩된다. 어머니의 일생은 자식을 위해 한평생을 삶의 제단 위에 바친 화석일 뿐이다.

  시의 시다움은 사물이 입고 있는 겉옷을 벗겨내는 데 있다. 겉옷이 벗겨진 사물을 통해서 독자는 비로소 사물의 참모습에 공감한다. 그럴 때 사물은 독자에게 새롭고 의미 있는 아름다움[가치]이 된다. 사물의 겉옷을 벗겨내는 시인의 도구는 그의 시정신이다. 시인은 이 도구를 통해서 사물의 참모습을 밝혀낸다. 아니 그려낸다, 아니 부여한다.

  시를 통해서 사물의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다. 우리가 광화문광장에서 밝혔던 몇 년 전의 촛불로 문맹의 시대를 벗겨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시정신으로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세밑을 목전에 둔 오늘[2022] 다시금 그곳에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시정신으로 무장한 그들은 촛불이 쓰는 천기를 아는 사람들이요, 시인들이다. 장엄한 시정신의 행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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