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
가을 들녘
  • 전주일보
  • 승인 2022.11.2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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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수 시인
정성수 시인

가을이 오는 들녘에 섰습니다. 당신이 삶의 끈을 놓고 떠난 몇 년 동안은 참으로 견딜 수 없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가기 싫다는 당신을 어쩔 수 없이 보낸 마음이 당신과 나의 들녘에 서는 일을 어이 필설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당신의 자리에는 당신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고 당신과 함께 쓰던 호미며 삽이며 농기구들이 우리 집 헛간에 아직도 여전합니다. 해마다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지게를 지고 들녘으로 들어설 때면 당신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은 착각으로 눈시울이 젖어 옵니다. 

감당하기에 너무도 큰 당신의 빈자리가 함께 거두어들이어야 할 이 많은 곡식들이 풍성하다는 생각을 자꾸만 밀어냅니다. 영원히 함께하자던 그 언약이 영원하지 못한 채 남은 생을 혼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또 어두워집니다. 

세상의 수많은 부부들이 평생을 함께하지 못한 체 이별을 하고 뼈 시린 고독을 씹으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파 옵니다. 소리내어 당신 이름 한 번 크게 불러보지 못하며 올해도 가을이 쓸쓸히 갑니다. 수확을 등에 지고 돌아오는 들녘에는 저미는 가슴 저 안으로 막막한 어둠이 가득가득 밀려옵니다.

당신이 계신 하늘나라에도 가을이 오고 들녘에는 곡식들이 풍성합니까? 가을 들녘에 서면 그리움으로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당신이여! 죽어서도 오는 이여 천국에서 안녕!


#황량한 들녘은 쓸쓸하다. 가을걷이가 끝났다는 것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력을 잃었다고 해서 모두 슬픈 것만은 아니다. 가을이 주는 특별한 느낌은 가을의 분위기와 정취를 주어 가을답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쉼’이라는 여유도 있다.

빈 들녘은 가을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복이다. 북녘으로부터 날아오는 철새들은 쓸쓸한 들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가을만의 정경이다. 들녘은 쓸쓸하지만 아름답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여유가 있어 좋다.

가을걷이가 끝난 후 볏짚을 논으로 돌려주면 흙에 힘을 보태주는 것이다. 볏짚은 겨우내 썩어서 지력이 좋아지고 영양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땅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또한 볏짚에는 낙곡落穀이 많아 철새들의 먹잇감이 되어 포만의 기쁨을 더해 준다. 볏짚을 논바닥에 그대로 두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철새들에게는 쉼을 주고 목숨을 보전하는 터전이 되어주는 것은 인간의 마지막 선심이기도 하다. 가을 들녘에 서면 해를 향해 돌고 돌았던 뜨거운 아픔과 차가운 고통이 향기로운 노래가 되어 너울거린다.

허허벌판이 말한다. 아프지 않은 삶은 없다고, 서럽지 않은 인생은 없다고, 이제 쓸쓸한 들녘에서 느끼던 가을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는지. 없어진 가을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 지금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 또 다른 철새들에게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할는지? 그대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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