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공원의 가을 풍경
덕진공원의 가을 풍경
  • 김규원
  • 승인 2022.11.17 15: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 광 섭(수필가)
문 광 섭(수필가)

  엠마오 호스피스병원에 들어간 친구 J를 보러 갔었다. 생각과 달리 의연한 모습으로 맞아준다. 내게 건네는 인사말이 선방의 법사에게 설법을 듣는 듯했다. 돌아와 이틀 동안이나 가슴이 미어져 무슨 일이고 손에 잡히질 않았다. 오늘은 친구라도 불러내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고 벼르던 참인데, 같은 직장에 있었던 친구가 점심이나 하자 해서 나갔다가 잠시나마 속을 풀고서 돌아오던 참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차창으로 들어오는 가을 풍경이 어딘지 쓸쓸해 보이고 허전해 보였다. 가로수가 은행나무거나 느티나무여서 노랗거나 갈색의 잎사귀가 보도위에 널려 있었다. 갑자기 붉은색으로 곱게 물든 단풍나무와 빨갛게 채색된 가을 숲속을 걷고 싶어 덕진공원 입구에서 내렸다.

 

  가끔 계절의 정취를 마시며 행락객들 속에 휩쓸리고 싶을 적엔, 공원 입구서 내려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집까지 30여 분을 산책하며 머릿속을 정리하거나 흐트러진 마음을 달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오늘은 공연장 주위로 늘어선 단풍나무의 아름다운 장관을 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쪽으로 약간 기우러진 해가 내가 기대한 이상으로 갖가지 색을 연출하고 있다. 단풍잎이 옅은 노란색부터 시작해 점점 붉어지며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이루어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석양의 노을처럼,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물든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가족을 동반한 사람들이 정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잠시 앉아서 한가로운 여유로움도 즐기고, 높아진 하늘과 가을만이 베푸는 풍요로움을 만끽하겠다는 생각으로 단풍나무 밑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 하나가 시선에 들어왔다.

 

  팔십 중반을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공원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아서 늦은 점심을 들고 있었다. 할아버지 외모는 건장한 편인데다 중절모를 쓰고 있었고, 할머니는 낭자머리에 틀니도 없는지 볼이 쑥 들어가고 허리도 굽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마치 어린애를 돌보듯 할머니 입에다 반찬을 넣어주었다. 내 굳어진 생각으론 할머니가 할아버지 입에다 넣어줄 것으로 짐작했었다. 더구나 두 분의 마주보는 눈빛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아 마치 젊은 연인들처럼 편안했다. 누구든지 보란 듯이 아주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고정 관념에 찌든 나로선 마치 뒤통수라도 한 방 맞은 듯싶어서 눈길을 돌리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화교를 비켜 50여 미터쯤 걸어가는데, 마주 오는 또 다른 노인네 부부를 발견하고 등나무 밑 의자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허리 굽은 할머니 왼손을 잡고 이끌고 있었다. 할머니는 오른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땅을 보랴 앞을 처다 보랴 안간힘을 쓰며 따라 걷는다. 이 할아버지 역시 건강한 편으로 구십 가까이 들어 보였다. 할머니 거동이 불편한 게 딱하고 안타까워 일부러 운동 겸, 모처럼 단풍 구경도 시킬 겸 모시고 나왔나 싶다.

  조금 전 보았던 부부와 비교하며 상상해 본다. 앞서 본 노부부들은 할머니가 약간 치매 끼가 와서 안타깝게 여긴 할아버지가 소풍을 데리고 나왔나 싶다. 할머니를 어린애 대하듯 사랑스럽게 보살피며 반찬을 입에 넣어주는 모습에서 젊은 날 바람피운 걸 미안해하는 태도를 연상할 수 있었다. 반면 방금 본 노부부는 어렵던 시절에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애들 낳고 키우느라 고생한 아내를 보살피는 듯했다. 자기보다 먼저 꼬부라져 버린 아내의 몸이 안타까워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정성을 다하지 싶었다.

 

  건지산 자락으로 홍시처럼 붉은 가을 노래가 여울진다. 오늘 덕진공원서 만난 두 쌍 노부부들이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아름다운 사랑을 기억한다. 다시 엊그제 찾아본 친구 생각에 가슴이 아리듯 치민다. 그의 의연한 작별 인사를 되뇌어보며 인생무상, 덧없는 시간의 조화를 실감한다. 내 나이도 팔십 줄에 들었으니 이미 깊은 가을이다. 내 가을도 곱게 물든 단풍처럼 아름답게 세상을 물들이는 계절이기를 꿈꾸어 본다.

 

(2022. 10. 2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