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익어버린 자의 푸념
폭삭 익어버린 자의 푸념
  • 김규원
  • 승인 2022.11.10 1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 고 운/수필가
김 고 운/수필가

고등학교 동창생 가운데 아직도 울트라마라톤을 즐기는 친구가 있다. 올해 고등학교 졸업 60주년 행사에서도 전주 인근 지역을 돌아 60km를 달려 행사 시간에 모교 정문을 통과해 들어와 동기생들의 부러움과 동문들의 박수를 한몸에 받았다.

소아과 의사인 그는 57세에 건강이 나빠져 걷기조차 불편한 몸으로 달리기를 시작해 풀코스 완주 기록만 360여회에 이르고 매년 울트라마라톤 대회를 찾아다니며 참가한다. 등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세계 고봉들을 섭렵했다.

몸집이 작고 가벼워 무릎에 무리가 덜하다는 잇점이 있다지만, 80세까지 울트라마라톤을 즐기는 그의 체력은 분명 특이하다. 나이를 잊고 계절을 잊은 그의 노익장에 박수를 보내며 부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지난해 10월 하순쯤, 전북도 교육청 옆을 지나다가 철쭉 한 가지가 피어 있는 걸 발견했다. 기온이 초봄 즈음과 비슷해지자 봄인 줄 착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봄에 피려다가 피지 못한 꽃이 가을에 기온이 적당해져서 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세상 어디나 가끔은 돌씨가 나와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하지만, 이 계절에 꽃을 내는 건 무엇인가? 다른 가지들은 서서히 잎을 떨구어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데 저 홀로 꽃을 피운 심사를 헤아려본들 내 재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이다.

한참을 서서 서늘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쩌면 지금 잎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하는 다른 가지들의 심사가 내 심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금도 울트라마라톤을 달리는 친구를 보며 걸핏하면 허리가 아파서 찜질하고 운동요법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하는 내 처지가 너무 측은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나도 한 때 마라톤을 즐기고 자전거로 하루 200km를 거뜬히 달렸다.

그러다가 신문사에 출근하랴, 책 만들랴, 늘그막에 컴퓨터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일하다가 몸을 버렸다. 이제는 할 수 없는, 내 소망에 닿을 수 없는 그런 상실감, 이루지 못할 상념에 아파하는 마음으로 그 친구를 부러워한다.

지금 꽃을 피운 가지가 내 친구처럼 넘치는 힘을 발휘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 보라는 듯이 유유히 꽃을 피우고 서 있다. 저 모습이 내년 봄을 기대하며 쓸쓸히 잎을 떨구는 다른 가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내년 봄에 한꺼번에 피는데 끼어 아무리 자랑해 본들 사람들의 눈에는 한 무리 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느니 이 가을에 홀로 피어 실컷 자랑하고 내년 봄에 다른 꽃들이 피어날 때 편안히 쉬겠다는 저만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멋진 생각이다.

세상에 나와서 남들과 함께 흐름에 묻어가는 삶을 사느니, 뭔가 반짝하고 드러나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도 바로 저런 생각이었을 듯하다. 한데 이 늙바탕에 제아무리 몸부림하고 용트림한들 얼마나 반짝하고 빛이 나겠는가? 한편으로는 남이 알아주든 말든 나 홀로 반짝인다고 생각하면 또한 그런 것이려니 싶기도 하다.

그래, 나도 반짝여 보자. 꺼져버린 잿불에 숯불이라도 한 덩이 얻어 넣고 다독거리고 바람을 불어넣어 한바탕 춤사위를 벌여 보는 건 어떨까? 백조가 죽음을 앞두고 날개를 펴 펄럭이며 큰 소리로 울고 쓰러진다는 swansong이어도 좋다.

아픔과 그리움 따위는 집어던지고 이제 태어난 듯 새로운 세상으로 나서보자. 철모르는 철딱서니 짓이라 한들 어떻냐. 나도 저 꽃처럼 모두 시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우뚝 꽃을 피워 내보련다.

뜨겁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60년을 되돌려 싱싱한 젊은 눈으로 곱고 희망찬 것에 마음이 꽂혀 두근거릴 수 있는 마음으로 살자. 늙었다는 건 드러난 겉모습일 뿐이다.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지 않던가? 그래, 폭삭 익어 넘쳐버린 몸이지만 뭔가 보여주자. 말로는 무엇을 못 할까마는. 그래도, 그래도 그냥 시들어 스러지는 건 아무래도 너무 측은하다.

더하여, 하나 소망한다면 이 가을에 쓸쓸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좋은 사람과 나란히 걸으며 어깨를 부딪기도 하고 머리를 맞대기도 하며 한없이 걸어볼 수는 없을까. 손잡고 커피 향 좋은 집에 들어가 커피잔을 나란히 놓고 눈 마주쳐 가만히 웃어보고 싶다.

작은 마음에 살포시 기대보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