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하찮은 이름도 뜨겁게 불러주기”
“시, 하찮은 이름도 뜨겁게 불러주기”
  • 김규원
  • 승인 2022.10.03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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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좋은 삶-78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1958 경남 진해)어머니의 그륵전문

시는 사람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가르친다. 이 말은 시가 겉으로는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시에 감동을 받은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가 불한당 같은 자들을 감화시켜 개과천선[改過遷善: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쳐 착하게 됨]하게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선남선녀에게는 선성의 옷자락을 적시는 밤이슬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의 실용적 효과를 흔히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비유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말 한 마디, 글 한 줄에서 인생의 앞길을 비춰주는 등불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시가 반드시 무슨 실용성 있는 가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에 따라서는 그런 가치 있는 덕목을 찾아보는 것도 시를 읽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첫째로 배울 것은 입말과 글말의 차이다, 우리가 항용 부려 쓰는 말이란 것은 반드시 표준화되어 규격화된 말만 골라 쓰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오는 입말은 글말과는 사뭇 다른 정감이란 것을 담고 있다. 말도 습관이다. ‘말버릇이라 하지 않는가. 이런 입말을 써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감이 오고갈 수 있다. 어머니의 입말 그륵은 표준어 그릇에는 담을 수 없는 어머니의 성정이 듬뿍 담겨 있다. 시적 화자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이런 정감이 담긴 말을 통해서 비로소 나의 어머니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지 않던가.

둘째로 배울 것은 음운音韻의 섬세한 차이가 빚어내는 말맛이다. 말에도 무슨 이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시는 바로 이 말맛을 제대로 담아내는 언어의 그릇이다. 시적 자아가 어머니의 그륵에서 느낀 말맛은 바로 그릇이 담아낼 수 있는 내용물, 즉 물에 대한 뜻으로 옮아간다. 물의 미덕이 무수히 많지만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수평의 지향성이다. 높낮음이 없는 세상, 귀천이 따로 없는 사람세상, 모두가 사람됨으로 평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그륵에서 그럼 말맛을 느끼고 있다.

셋째로 배울 것은 배움의 본질이다. 우리는 배움이라면 학교만을 상정한다. 교육의 3요소로 교사-교육내용-학생을 꼽는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 바로 학교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잘 배웠느냐보다는 어느 학교에 다녔느냐를 더 치는 세상이다. 참으로 웃픈[웃기고 슬픈]현실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배움이 학교에서 [교과서]’로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정말 소중한 배움은 인생[체험]’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그릇에 담길 내용물과 인생에서 익힌 그륵에 담길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매우 온당한 일이다.

넷째로 배울 것은 지행일치, 지행합일, 언행일치 같은 덕목이다. 이런 덕목은 사람됨에 필수 요소지만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하여 먼저 사리를 가렸다고 알려진 왕양명도 지행합일知行合一앎과 행실이 일치해야 한다고 강요하기보다는 [배움]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한다, 배움[] 이후의 실행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학교 공부에서 앎을 터득한 자들은 지식이 책에서 머물고 자신의 행동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체험을 통해 앎을 터득한 사람[어머니]는 이미 삶이 곧 앎으로 육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런 분들에게 지행합일을 논한다는 것이 난센스일 뿐이다. 난센스의 극치는 곧 진실을 사전에서 찾는 메마른 지식인들이다.

다섯째로 배울 것은 사물마다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출석을 부를 때 학생의 이름 대신 번호로 출석 점호를 한 때가 있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때의 웃픈 실화다. 그러다가 인권에 대한 의식,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소중한 인격체임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번호 대신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게 되었다. 어찌 사람뿐이랴. 의식 없는 글쓰기의 오류 중에 좋은 예가 바로 이름 없는 잡초들이 무성한어쩌고 하면서 글을 써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자신만 모를 뿐 이 세상에 이름 없는 사물은 없으며, 잡초라고 불려도 좋을 풀은 없다.

더구나 시인은 하찮다 여기는 사물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것도 뜨겁게 불러주는 사람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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