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란 이름의 반 문명”
“문명이란 이름의 반 문명”
  • 김규원
  • 승인 2022.08.2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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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 마차가 거리를 메우자

파리와 런던의 시가지를 온통 말똥이 점령했었다지

말똥보다 가득하고

말똥보다 무서운

배기가스 매연이 나타날 줄 몰랐었겠지

그리운 말똥

먼 훗날에도 시인은 여전하겠지

그리운 매연

이라고 쓰겠지

-고운기(1961~. 전남 보성)문명전문

실제로 그랬다고 했다. 유럽에 말장화라고 하는, 목이 긴 부츠가 발달하게 된 것이 거리마다 넘치는 똥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럽 사람들은 근대가 오기 전까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세식 변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말똥뿐만 아니라, 사람의 용변도 길거리에, 창문 너머로 휙~ 내던져서 해결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문명이라는 게, 그리 단순하게 우수하거나 미개하다고 함부로 속단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인류가 과학문명의 혜택을 스스로 거두지 않는다면[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기필코 이 세상이 말똥보다 더 무섭고, 더 치명적인 독가스가 차고 넘칠 것은 뻔하다. 하나뿐이 지구를 구하자는 세계기후협약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미국이 탈퇴를 선언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 누구도 자동차가 주는 편리한 혜택 때문만이 아니라, 자동차라는 산업이 주는 경제적 영향 때문에 쉽사리 자동차를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런던스모그현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했듯이, 죽음의 가스라고 하는, 자동차가 배출하는 배기가스와 그로 인해 발행하는 미세먼지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럴 때 우리는 개구리효과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변온동물인 개구리를 냄비에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저항하지 않고 견딘다고 한다. 낮은 온도에서 서서히 높아지는 물의 온도에 적응하며 버티다가 마침내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모른 채 열탕을 수용하는 것이다. 배기가스에 무방비로 노출된[하긴 마스크를 착용하는 거나, 공기청정기를 집집마다 들여놓는 것도 방비라면 방비이긴 하겠지만] 인류가 개구리의 신세보다 조금도 나아보이지 않는 것은 나뿐일까?

항온동물인 인간은 열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하여 조금 추우면 보일러를 틀어대다가, 또 조금만 더워지면 냉방기를 틀어대며 항온을 유지하려 자발을 떨어댄다. 그러나 생명 활동의 필수품인 공기나 음용수의 변화에는 온도처럼 민감하게 대처하기는커녕 방관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항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이 마시는 공기와 물을 함부로 오염시키면서도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새다.

이 작품에서는 시인만이 그런 걱정을 한다고 했다. 말똥 때문에 진저리를 쳤던 사람들이, 말똥보다 더 치명적인 배기가스가 만연하자, 비로소 그리운 말똥시대를 노래하는 꼴이 아닌가! 친자연적이니, 친환경적이니, 생태학적이니, 온갖 현란한 말들을 동원해서 자연환경의 오염을 걱정하지만, 그 말을 쉽게 풀면 그리운 말똥일 터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시인만이 걱정하는 걸까? 시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이고, 시인의 사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시는 현실을 미화하거나, 풍요를 노래하거나, 전쟁에서 이긴 자를 찬양하는 순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시는 언제나 현실 너머의 미래를 내다보거나, 현재의 안에 감추고 있는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존재가치를 빛낸다. 시가 설 자리는 따로 있다. 무명용사가 잠든 초원, 가난한 사람들이 신음하는 뒷골목, 고통 받는 사람들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반지하, 탄압 받는 사람들을 위한 레지스탕스가 되기를 스스로 원하는 것-그것이 바로 시의 운명이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다. 배부른 돼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며,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 스스로 현실과 부조화 할지라도 독배毒杯 마시기를 거부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어야 한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시인이 배고프고, 시인이 외롭고, 시인이 철저히 고독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시인 자신에게는 불행한 노릇이지만, 인류 공동체에게는 덕이 되는 노릇이 아닌가! 참으로 아이러니 하면서도 기묘한 관계설정이다.

그래서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라고 했다. 잠수함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산소. 이것을 매우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토끼라는 것이다. 인간보다 한 발 앞서 예민하게 산소 결핍에 반응하는 토끼를 통해서 잠수함은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인류 사회라는 잠수함의 산소 결핍을 한 발 앞장 서 민감하게 반응해서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그래서 먼 훗날에도 시인은 여전하겠지/ 그리운 매연/ 이라고 쓰겠지먼 훗날뿐이 아니다. 지금도 세상은 시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산소 결핍이 목전의 현실이라고 목이 터져라 왜장쳐도 세상은 도무지 그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말똥보다 더 무서운 매연이 등장하자 그리운 말똥이라고 노래했다면, 매연보다 더 지독한 무엇이 나타나서 그리운 매연이라고 노래하게 될까? 지구촌이 멸망을 향해 치닫기만 하는 시계를 그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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