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이 돌날에
하민이 돌날에
  • 김규원
  • 승인 2022.08.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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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수필
황 정 현/수필가
황 정 현/수필가

여름 햇살로 더위가 무르익는 7월에 손녀가 태어났다. 나는 고고의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꿈결에서 맑은 울음소리를 들은 듯싶다. 음악처럼 훌쩍 담장을 넘어 많은 사람의 귀를 간질이며 퍼져나가는 아늑한 꿈자리 소리였다. 울음소리는 감미로웠고 새근새근 숨소리 장단에 맞추어 생명의 약동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였다. 소리의 파동을 귓속에 간직하고 사흘이 지난 후 산후조리원 유리창 너머로 손녀를 보았다. 여리고 여린 얼굴로 입술을 가늘게 달싹이며 포근히 잠자고 있다. 세상에 처음 드러내는 모습을 설레는 가슴으로 바라보니 마음이 떨리고 감격이 몰려왔다.

울음으로 불편을 말하고, 울음으로 배고픔을 전달하며, 울음으로 자신에게 눈을 돌리라는 채근이다. 얼마나 귀여운 생명의 시위인가. 울음 한 번에 기저귀를 갈고, 울음 한 번에 젖을 물리며, 울음 한 번에 가녀린 몸을 살피는 손길로 성장의 서시는 무르익어 갔다. 가끔 새근새근 잠자는 중에 가슴 서늘하게 웃음을 띠었다. 자람새의 아름다운 모양 갖추기인 듯싶었다. 세상에 한마디 하는 대신에 울음으로 본능적 뜻을 전달하는 모습이 앙증스럽고 거룩해 보이기도 했다.

하민이라는 이름으로 고고성의 언덕을 넘어 눈을 들어 소리 나는 곳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굴리는 수준으로 자랐다. 눈으로 확인하고 냄새로 익히는 아기의 생존 본능이 조그마한 움직임조차 살아남는 일의 기본과 연결되며 타협으로 통하고, 적응하는 단계에 이른다. 누가 자신을 보살피고, 누가 자신에게 무관심하며, 누가 자신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예뻐해 주는지 차츰차츰 뇌리에 심고 있다. 살아남는 본능의 필살기를 끊임없이 반복적 자극을 통해 자신의 느낌 속에 간직하고 있다.

웃음으로 맞으며 반가운 사람에게 창창 옹알이하는 하민이가 여명의 장미꽃보다 가슴 가득히 희열을 안긴다. 세상천지의 고민을 잊을 만큼 티 없는 웃음꽃을 피우는 하민에게 빠지는 시간은 정녕 내 나이 십 년이 뒤로 가는 듯했다. 젊었을 때의 내가 어린 딸에게 품었던 신비와는 다른 아늑한 평안의 감정이 일었다. 그런 연유인지 하민이의 옹알이가 늙어 쇠잔한 가슴에 꽃물을 퍼붓는 생기로 새 삶을 여는 기분이 들게 하였다. 찡그리고 울어도 꽃이고 방긋 웃어도 라일락이며 가만히 있어도 기품 서린 매화로 보이니, 나는 온통 하민에게 빠진 바보가 되었다.

하민이는 손에 쥐는 감촉을 익히더니 그걸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보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어 더욱 조심해 보살핌이 필요하다. 손에 쥐는 것마다 입으로 가져가는 생물적 본성은 어린 아기 태생의 습성이기에 돌봄의 집중이 더욱 요망되었다. 세상의 달고 쓰고 시며 짜거나 해로운 맛의 세계를 혀로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는 엄밀하고 냉혹한 경계에 들어선 것이다. 아기를 돌보는 진정한 헌신이란 모든 위험하고 해로운 상황을 끊임없이 주시하는 데 있다. 유아기와 소년기를 건너간 세상 사람들의 성장이란 부모님의 세심한 보살핌과 주변 친지들의 무구한 관찰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돌날이 가까워지면서 하민이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방에 있는 물건은 모두 움켜쥐거나 만지작거리는 대상이 되었다. 여러 가지 장난감에 싫증을 느낄 때마다 방안을 두루 다니며 여닫이가 있으면 모두 열고 그 속을 살핀다. 이것저것 손에 쥐는 대로 만져보고 방바닥에 늘어 놓았다. 감각적인 호기심을 표출하며 성장의 날개를 더욱 힘차게 파닥이는 모습이었다. 가는 바람이 불 때마다 연한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다. 바람이 시간의 머리칼을 흔들었거나, 시간이 바람의 머리칼을 흔들었거나, 성장하는 무늬는 서로 융화하며 삶의 세상을 물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분간하는 돌날 가까운 아기란 존재의 우아함을 충분히 지닌 소우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하민이를 안을 때는 아득한 그리움과 향긋한 핏줄로 당기는 작은 우주를 느낀다. 어느 먼 하늘에서 내게로 온 소중한 인연의 별이기에 내 삶이 다하도록 가슴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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