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7주년을 맞이하며
광복 77주년을 맞이하며
  • 김규원
  • 승인 2022.08.1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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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일본왕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은 일제의 손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軍政)이 시작되는 바람에 우리는 일본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했다.

군정 당국은 일제에 협조하던 친일 인물들을 기용하여 주요 부서에 앉혀 손쉽게 통치하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제에 협조한 자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했지만, 미군은 조선인들의 염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민족주의자인 김구 · 김규식 등은 남북한이 갈라져 정부를 수립하는 데 반대하며 북쪽의 인사들과 접촉하였으나, 북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따로 정부를 수립하면서 남북은 다른 이념의 다른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결 관계에 들어섰다.

통일국가를 염원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미국과 소련이 각축하는 한반도의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남북에 따로 정부가 세워진 뒤에도 김구 등은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유엔에 남북 분단국가해체와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49626일 김구가 암살당하는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군정 1년을 지나는 동안 친일파들은 일본이 도망가면서 남긴 재화를 챙기고 세력을 형성하여 이듬해 새로 들어서는 이승만 정부의 요직을 두루 차지했다. 이승만 정부는 겉으로 반일을 표방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어 명분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 처벌 대상이 정부 요직 인사에 이르자 돌연 특위를 습격하여 주요 인사를 잡아 가두고 특위를 해체하였다. 친일파의 힘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라의 제도와 법률은 일제의 그것을 거의 답습하는 형태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친일파가 국정 모든 분야의 전문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후 박정희가 쿠데타로 국권을 탈취하면서 친일 세력은 더욱 굳건한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경제개발을 빙자하여 헐값에 일본의 죄악을 합리화하는 한일 협정이 이루어졌다. 그 뒤에도 일제 잔재 청산은 정권마다 약속했지만, 뿌리 깊은 친일 세력의 준동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일제의 잔재가 넘쳐난다. 정부조직의 명칭이나 행정 공무원의 직제, 오늘날 최고의 권력으로 군림하는 검찰 조직과 운용 형태까지 일제의 것을 답습하고 있다. 새정부와 여당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상당한 공을 들이는 눈치다.

윤 대통령이 일본 극우 세력의 수장인 아베의 국내 빈소에 직접 조문할 만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다시 광복절을 맞으며 과연 일제 잔재 청산이 가능할 것인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여전히 그 오래된 청산의 소망을 상당 기간 속앓이하며 기다려야 할 듯하다. 점점 그들의 만행과 치졸함, 우리의 부끄러움을 기억하는 세대가 줄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에. 그저 날짜를 기억하는 걸로 만족하는 광복절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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