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火焰)에서 화엄(華嚴)을 직관하다.”
“화염(火焰)에서 화엄(華嚴)을 직관하다.”
  • 전주일보
  • 승인 2022.07.1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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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좋은 삶-70회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게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이면우(1951~. 대전) 화엄경배전문

 

화염은 불꽃이다.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모양을 지켜보노라면 그 치열함에 온 정신을 팔리기도 한다. 어렸을 때, 아궁이 앞에서 세찬 불길을 바라보며 불이 참 좋다!’고 감탄할라치면 어른들이 나무랐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불길을 칭찬하면 불길이 그런단다. “네 어미를 살라 먹어라이 말을 들으며 얼마나 무서웠던가? 아마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불장난을 하면 밤에 자다가 오줌 싼다는 경고와 마찬가지로 불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려는, 과장된 경고성 금언으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럴지라도 경고성 금언으로 금기시할 만큼 불길은 맹렬하다. 화재보다 무서운 것은 수재라고 한다. 화재는 그 재로 남거나 그루터기라도 남기지만, 수재는 모든 것을 쓸어 없애기 때문이다. 일변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불길의 맹렬함과 거침없음을 목격하노라면, 화재-불의 두려움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럴지라도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불길도 그렇다. ‘불의 발견은 인류에게 문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만든 인간들을 안타깝게 여겨서 천상의 불을 훔쳐다 주었다.

그 벌로 그는 제우스의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오케아노스 강 끝 코카서스 지방의 카우카소스(Caucasos)산 꼭대기 쇠사슬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벌을 받게 되었다. 그는 30여 년 동안 그 형벌을 받았으나, 간은 매일 다시 자라났기에 죽지 않았다.

불은 만물을 태워 없애기도 하지만, 불의 온기야말로 만물을 살아나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그것이 바로 화엄의 세계다. ‘화엄은 불법佛法의 광대무변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화엄경>을 주요 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의 가르침을 나타내기도 한다. 화엄華嚴이란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뜻의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대승불교 초기의 주요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에서 비롯되었다.

<화엄경>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그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설법한 경문이다. 정식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인데 이는 불법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모든 중생과 사물을 아우르고 있어서 마치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맹렬하게 타오르는 보일러 불꽃을 투시구로 바라본 시적화자는 만물을 태워 없애버리는 사나운 불길만을 본 것이 아니다. “내 가족의 웃음과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타오르고 있음을 본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처럼 불길도 그렇다. 만물을 태워 없애기도 하지만,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고 나지막이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뜨거운 불길은 만물을 재로 만들지만, 서늘한 불길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또 다른 불의 힘이 된다.

그 불길이 날 먹여 살렸다고 했다. 밥도 주고, 돼지고기도 구워줬으며, 공납금도 다 저기[불길]에서 나왔다고 했다. 저 불길에게 어찌 고맙다인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고마움을 어찌 나지막한 말한 마디의 공치사로 끝낼 수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시적화자의]육신을 들어 네게[불길]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장엄한 깨달음’, 잡화엄식雜華嚴飾-화엄華嚴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는 투시구로 자신을 드려다 보겠다는 화자의 깨달음이 장엄한 꽃[華嚴]’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시심을 보인 시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직업은 보일러공이다. 최종 학력은 중졸이며 마흔 살이 넘어서야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신춘문예나 문학 전문 잡지에 글을 싣는 등 일반적인 방법으로 문단에 나오지 않고, 주변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첫 시집 저 석양을 펴내면서 문단에 나왔다.

거기 나오는 시인의 이력은 '학력 별무, 건축배관공'이다. 시집 저 석양》《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십일월을 만지다등을 펴냈다.

이면우 시인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시를 쓰는 일이 학력[學力 혹은 學歷]과는 무관한 일임을 알겠다. 어찌 시뿐이겠는가? 예술 작업하는 사람의 정신세계는 이성[지성]이 감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정서]가 이성을 제압하는 형국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그 정신을 들여다보니 불길과 아내는 뜨겁게 서늘하다는 모순을 일상으로 살아야 하며, 마침내 화염에 자신을 소신공양하여 화엄경을 경배할 수 있어야 가능할 법하다. 시를 사는 일이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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