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느낌’과 마주하기”
“시, ‘느낌’과 마주하기”
  • 김규원
  • 승인 2022.06.27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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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투명한 개미들이 쏟아진다 ()

머리에 개미의 발톱이 박힌다 ()

투명한 개미들이 투명한 다리로 내 몸에 구멍을 뚫는다 ()

마구 뚫는다 ()

그를 떠밀면 떠밀수록 그는 나를 둘러싸고 오히려 나를 결박한다 ()

내 심장의 화면에 투명한 글자들이 새겨진다 ()

나는 해독하지 못한다 ()

글자들이 이어져 어떤 파장을 그린다 ()

새겨진다 ()

하느님,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

못 알아듣겠어요 ()

이 전깃줄은 물이잖아요? ()

 

-김혜순(1966~. 경북 울진) 전문

시의 본질은 이미 생각하던 방법과 다르게 생각하기이며, 이미 보던 방법과 다르게 보기이며, 나아가 이미 말했던 방법과 다르게 말하기이다. 그게 시의 제 모습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미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시의 의미를 끌어낼 수 있겠는가? 이미 익숙한 눈길로 보아서 무슨 시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이미 말했던 대로 말한다면 무슨 새로운 놀람[미적 깨달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는 기존의 사고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발상법으로 사유하는 일이며, 시는 기존의 눈길이 아닌 전혀 남다른 심안으로 사물을 보는 눈뜨기이며, 시는 이미 익숙한 발성법이 아닌 전혀 새로운 말하기 형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생각하고 보고 말한다는 것일까? 막연히 머리에 떠오르는 것, 눈에 띈 것, 입술이 근질거리는 것, 그것들을 생각하고 보고 말하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곰곰 생각해 보면 생각과 발견과 입말의 이전에 바로 느낌이 있음을 간과하고서는 생각도 관찰도 말도 그 길을 잃고 만다. 사유의 꺼리에 따라붙는 그 느낌을 사고하는 것이다. 눈길을 통해서 여과된 느낌을 보는 것이다. 입에서 소리가 되기 전에 그 소리를 불러오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보고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느낌의 총화인 셈이다. 느낌을 여과하지 않은 것을 생각 꺼리로 삼지 않으며, 느낌을 자극하지 않은 사물에 육신의 렌즈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느낌을 통과하지 않은 말의 씨앗이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 그 느낌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시[藝術]가 가능하다.

그런데 시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보고 말하는 방식대로 따르거나 그에 편승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피해서 생각의 오솔길을 내기를 즐겨하는 사유자, 다른 사람이 지닌 범상한 눈길의 렌즈가 아니라 자신만의 광도와 명도를 지닌 눈뜨기를 선호하는 투시자, 다른 사람이 발설하는 통상의 말 길과 입 길을 거부하고 제 나름의 목소리를 지닌 발성자, 이들을 일러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마다 다른 느낌의 파장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하는 형식에서 나 아니면 안 될 그것’”을 일러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누구나가 아니라, 나만의 느낌을 나만의 사유로 끌어들여 나만의 심안으로 밝혀내며, 나만의 발성법으로 말하는 형식, 그것을 일러 우리는 마땅히 라고 부른다.

를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화자의 느낌일 뿐이다. 그래서 시가 가능하며, 이런 생각의 힘과 관찰의 묘미를 지니고, 자기만의 발성법으로 표현한 를 맞으며, 우리[독자]는 모처럼 상쾌한 빗줄기에 온몸[미적 쾌감]을 적시게 된다.

아하, 비를 형상하는 개미의 착상이 절묘하다. 하늘에서 개미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머리에 그 개미의 발톱들이 박힌다고 한다. 작살비를 맞아보지 않아도, 느닷없이 내리는 소나기에 온몸을 적셔본 적이 없어도, 개미[]의 발톱들이 머리에 박히는 느낌을 어찌 느닷없는 반어의 언어로만 치부할 것인가?

우리는 인간사를 해석할 수 없을 때, 아니 인간사의 범주를 가늠하기 어려울 때, 그 책임이나 원인을 하기 쉽게 하늘에 떠넘기곤 한다. 가뭄이 심해도 하늘이 무심하다고 불평하고, 장마에 석 달 열흘 홍수가 져도 하늘이 너무 한다고 탓을 한다. 하늘에 계실님께서 무슨 능력으로 숱한 별들 중의 하나인 지구 한 구석의 가뭄과 홍수까지도 조율하실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볼멘소리를 해 댄다. 하긴 하늘 메시지의 통신 케이블이 전깃줄이 아니라, “물이잖아요?”[그러니] 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는 어느새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통신 케이블[전깃줄]이 되었다. [이렇게] 시란 사물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대로 보는 것을,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런 마음결이 시의 시다움과 시인의 시인다움을 제대로 드러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역시 시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인생을 참 재미있게 살 수 있는 특별한 길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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