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쌍, 민낯, 청초함에 설레듯이
무쌍, 민낯, 청초함에 설레듯이
  • 김규원
  • 승인 2022.06.23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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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 운/수핗가
김 고 운/수핗가

  그 시절, 풋풋하고 어린 가슴에 설렘이 찾아오던 시절에 보이던 얼굴에는 쌍까풀이 흔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린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도 쌍까풀에 옅게 화장한 모습을 흔히 만나지만, 그 시절의 얼굴들은 모두 무쌍에 민낯이었다. 그런 얼굴처럼 꾸미지 않은 꽃이 작은 풀꽃이다. 고운 색과 겹잎으로 치장한 장미나 모란처럼 요란하지 않다. 홑잎으로 청초하고 앙증맞게 작아서 귀엽다.

 

  지난겨울에 봄이 오면 그 귀여운 작은 녀석들을 더 예쁘게 찍어 보겠다고 주머니를 털어 새 카메라도 장만했다. 그리고 겨우내 카메라 사용법을 보며 하나하나 연습하느라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초점을 제대로 맞추어 예쁘게 찍는 연습이다. 너무 작은 풀꽃은 맨눈으로 얼마나 멋진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다. 작은 꽃에 꽃가루가 피었는지, 더 작은 벌레가 꿀을 얻으러 찾아왔는지 렌즈로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래서 풀꽃을 만나면 렌즈를 통해 보기 전까지 설렌다.

  내 설레는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2월부터 부지런히 길섶에 봄까치꽃이 파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서 변산바람꽃, 복수초가 눈을 헤집고 피더니, 광대나물꽃이 피고 별꽃, 벼룩나물, 냉이꽃, 꽃마리, 살갈퀴, 얼치기완두, 봄맞이꽃, 점나도나물, 제비꽃, 주름잎, 참꽃마리, 콩다닥냉이, 조개나물꽃, 배암차즈기 등등 작은 풀꽃들이 잇따라 피어서 날 행복하게 했다.

  녀석들을 만나서 눈을 맞추고 사랑하는 일은 노인인 내게 중노동이라고 할 만큼 버겁다. 그런데도 그 작은 아이들은 늘 나를 설레게 하고 만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같은 모양인 듯싶어도 자세히 보면 꽃받침이나 줄기가 달랐고 크게 확대해 보면 전혀 다른 꽃잎 모양을 보여주었다. 만날 때마다 새롭고 몰랐던 모습이 새로 찾아온 사랑처럼 소중하고 그 새로움에 환호할 수 있어서 내 노년이 행복에 풍덩 빠졌다.

 

  봄내 고생하다가 좀 쉽게 촬영하려고 자동초점 렌즈를 마련했다. 그런데 녀석들이 다 말라 없어져 찾을 수가 없다. 요즘 가끔 비가 내렸으니 어쩌면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오늘도 삼천 천변 산책길을 누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이 뭔가 장만하고 기다리면 쉽게 만날 수 없고 준비가 안 된 때에는 불쑥불쑥 나타나 날 어리둥절하게 한다.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어디 풀꽃 사랑뿐일까마는 노구를 끌고 다니며 작은 녀석들과 눈을 맞추는 일은 어렵고도 행복하다.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제대로 들어맞는 내 만년의 풀꽃 사랑이다. 어렵게 촬영한 사진을 컴퓨터에 불러와 들여다보며 실망과 낙담이 이어져도 수백 장 가운데 몇 점 쓸만한 사진이 나오면 황홀하리만치 좋았다. 일하는 닷새 내내 촬영을 기다리다가 주말인 금·토요일에 나간다. 주말 촬영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사진을 열어보지 않았다. 당장 보고 싶어도 참았다.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나 이틀을 참는 그 기다림이 좋아서 미뤘다. 멋진 사진을 상상하며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사랑하는 사람의 창문을 두드리듯, 사진을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절정에 이를 때 비로소 컴퓨터에서 연다. 설레며 두근거리다가 모니터에서 멋진 풀꽃 사진을 만나는 기쁨을 어찌 한마디 말로 그려내랴!

 

  5월 하순에 이르도록 봄 가뭄이 이어졌다. 천지에 가득하던 봄꽃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더니 불과 2주 만에 다 사라졌다. 내년 봄이 되어야 다시 온 풀밭을 그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씨앗들의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씨앗들이 긴 설렘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여름에 피는 작은 꽃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얼굴들을 만나고 기억할 것이다. 홑잎이어서 더 청초하고 애련해 보이는 그 작은 꽃의 미소를 내게 보여주기 위해 지금 창문에는 가는 빗방울이 모여 줄기를 이루며 흐르고 있다. 저 물줄기가 땅에 스며 넉넉해질 때 다시 꽃마리도 별꽃도 피어날 것이다.

  그 예쁜 것들이 다시 피어나 날 두근거리게 하듯, 날 두고 떠난 그리운 이들도 오래지 않아 저세상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풀꽃들이 바로 내 곁을 떠난 그들의 화신(化神)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작은 꽃들이 날 설레게 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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