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책과 음악이 이야기를 걸어오다”
“자연과 책과 음악이 이야기를 걸어오다”
  • 김규원
  • 승인 2022.06.20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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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길에서

말의 발걸음 서서히 늦추며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를 때

아직 갈지 못한 둔덕을 바라보며

웬 일인가? 소리쳐 묻지 않는다네.

우리에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니까

부드러운 땅의 가슴에

괭이자루를 세워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돌담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온다네.

 

-프로스트((R. L. Frost.1874~1963. 미국)

이야기를 나눌 시간전문

  ‘바쁘다는 언사가 참 무성한 시대를 살고 있다. 법구경에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쉼 없이 타고 있나니,/ 너희들은 어둠 속에 덮여 있거늘.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느냐!-何喜何笑 命常熾然 深蔽幽冥 不如求錠고 꾸짖는 대목이 있다. 그럼에도 바쁘다는 말은 자신을 관용하는 변명으로 남발된다.

  내 생의 기름은 나날이 밭아가고 있건만, 한 번 줄어든 내 생명의 심지는 다시 회복되지 않건만, 이루어진 만남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건만, 오늘은-그런 삶의 순간들은 다시는 재연되지 않건만, 우리는 그냥 바쁘다는 성냥불로 기름에 불 지르고, 심지를 태워버리고, 만남을 지워버리고는 태평하다. 도무지 무엇이 나를 나답게 하는지, 무엇이 나를 내 안에서 온전하게 하는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이 산다(?), 아니 죽어간다!

  그럼에도 시는 일말의 구원이 될 수 있다니, 서양의 한 시인도 그런 바람을 우리 앞에 남겼다. “아직 갈지 못한 둔덕을 바라보며/ 웬일인가? 소리쳐 묻지 않는다네그냥 친구의 부름에 한걸음에 달려오는 사람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 “(밭 갈던 쟁기를 그대로 둔 채)부드러운 땅의 가슴에/ 괭이자루를 세워두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한걸음에 달려오는 사람을 일러 친구라는, 너무도 귀하지만 또한 찾기 어려운 그 이름을 부른다.

  친구라는 이름이 참 헐값으로 거래되는 세태다. 아니 친구라는 이름이 너무도 귀해서 점점 잊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다고 믿는다. 아니 독자들에게 그렇게 믿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논어 계씨편의 [孔子曰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를 가르치면서 내가 참 면구스러웠던 점을 기억하는 것으로-친구가 사람만이 아니라는, 나의 친구관을 늙다리에 고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공자께서는 곧고 성실하며 견문이 많은 이를 벗하면 유익하며, 편벽되고 무르기만 하며, 말만 잘하는 이를 벗하면 손해가 된다고 가르쳤다. 공자님의 말씀이 어련해서 잘못일 수는 없을 것이다. 벗을 사귐에 있어 손익계산을 앞에 둔다는 것이 조금은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어서 하는 말이다. 이 가르침을 교우의 기본 원리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매사 사람을 손익계산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곧고 성실하며 편벽되지 않은 것으로 사람 말고 무엇이 있을까? 나는 우선 자연을 꼽겠다. 자연은 사시사철 항상 제 몫의 언어로 맞아 주니 고맙다. 봄에는 꽃들의 화사한 수다로, 여름에는 짙은 녹음의 위로로, 가을엔 솜씨 좋은 화제畵題, 겨울엔 순백의 침묵을 풀어 눈보라 풍설風雪로 계절의 위엄을 전해준다. 그래서 자연은 언제나 나에겐 유익한 벗이다. 이렇게 자연을 사귀면서 얻는 이로움을 사람-벗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일이다.

  사람 말고 좋은 벗으로 책과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책과 음악은 매우 곧고 성실하기는 하지만 편벽된 면이 있다. 주제에 정통하려는 일관성과 문맥의 힘을 유지해 나가는 점에서 책은 관용이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데카르트)이라고 했으니,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가장 근접한 사귐일 수 있겠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철저히 홀로 이루어진다. 음악당에서 수많은 청중과 함께 음악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감상은 결국 혼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음악[교향곡]은 세계와 같아야 하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구스타프 말러)했으니, 비록 혼자 하는 감상 활동이지만 음악은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셈이다. 더불어 모든 것을 포용하고 대화할 수 있는, 열린 상상의 세계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 함께 책(독서)과 음악(감상 활동)은 프로스트가 친구라고 여길 만하다. 언제나 찾아가기만 하면 괭이자루를 세워두는 것은 물론이고, 향기로운 미소와 향긋한 차도 권하면서 자리를 내주는 좋은 벗이다.

  그럼에도 이들, 자연과 책과 음악을 벗으로 사귀는 데는 손익계산을 앞세우지 않아도 그만이니, 이보다 더 좋은 삼우가 어디 있을까? 저기, 저기 자연과 책과 음악이 우리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온전히 제공하기 위해 우리들의 돌담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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