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속내를 드러내는 방언의 묘미”
“절박한 속내를 드러내는 방언의 묘미”
  • 김규원
  • 승인 2022.05.23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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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문을 열면 능금밭 가득 능금꽃이 아찔하게 피어 있는 그 풍경 아득하게 바라보며 비명을 치는 노파 어깨 한쪽 맥없이 문설주로 무너진다

그 모습 힐끗 일별하던 네 살배기 손주놈이

되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중얼거리며 나자빠진다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이중기(1957~. 경북 영천)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전문

  김영랑의 시오매, 단풍들것네라는 시가 오버랩 되는 느낌이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시적 대상인 누이의 한 마디 탄식-감탄에 순간적으로 감전되고 만다. 소위 시정詩情-시적 정서에 공감하고야 만다.

  누이는 아마도 이 한 해가 다 가고 있는데,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데, 추석이 내일모레인데, 시절은 속절없이 마냥 흘러가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느라 제대로 단풍 들지 못하고 있느냐는 속내를 토해냈으리라. 그러자 누이의 속내를 알아챈 오라버니가 그런다. 누이야! 그리 걱정할 것 없느니라. 시절이 저렇게 아름답게 물들고 있는데, 너라고, 감잎 한 장에 감동하는 사랑 많은 내 누이라면, 때가 되면 제대로 단풍이 들 것이다. 그러니 그리 걱정할 것 없느니라. 우선 즐거운 명절 추석이나 맞고 보자꾸나.

  그러고 보면 첫 행의 오매, 단풍 들것네가 누이의 감동 어린 계절의 발견이라면, 끝 행의 오매, 단풍 들것네는 오라버니가 누이를 다독이는 시정 어린 위로가 될 것이다. 동어반복 같지만, 그 담고 있는 시적 정서가 다를 수밖에 없는 마음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말이 앞을 열고 뒤를 닫음으로써 이 시의 정서는 온통 붉은 마음결이 시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경상도 방언에 기대고 있는 이중기의 시를 전라도 버전으로 옮기면 아마도 이럴 것이다. <오매, 꽃은 허벌나게 피어뿔고 시방 어떻코롬 산다냐>

  시는 이지[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감탄[정서]의 산물임을 거듭 확인하는 일이 즐겁다. 김영랑 시인이 누이의 단 한 마디에서 가을도 불러오고, 얼마 남지 않은 추석 명절의 설렘도 불러왔다면, 그래서 삶의 그림을 정감 어린 유채색으로 그려내고 있다면, 이중기 시인은 한 노파와 그의 어린 손주가 주고받는 대화 같지도 않은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 둠으로써 계절의 절정감을 살려낸다.

  “어깨 한쪽 맥없이 문설주로 무너진다는 노파의 눈에는 봄꽃만이 아닌 어떤 정경이 비쳐지고 있을까, 안 봐도 훤하다. 그게 시의 공감 능력이 아니겠는가!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라니? 꽃은 피고, 바야흐로 꽃피고 벌 나비가 춤을 추고 온갖 새들이 노래하는 좋은 시절을 만났으니 이 아니 좋을시고라고 태평가를 불러도 모자랄 판에 우에 살아야 하느냐고 탄식하는 노파의 심정이 궁금하긴 궁금하다.

  그러나 한 편 생각해 보면 궁금할 것도 없다. 인간은 어떤 상황이든지 절정에 이르면 말이 필요 없는 시점이 온다. 또는 소위 기가 막히다는 표현만이 가능할 때도 말문이 막히기도 한다. 몸에 흐르는 기가 원활하지 않아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노파의 처지가 어떤 상황이기에 기막혀 살 바를 몰라 하는가? 아마도 봄날의 상황이 노파의 처지와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자연 발생적인 탄식처럼 흘러나왔을 것이고,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전부인 네 살배기 손주 녀석은 할머니의 어투를 흉내 냄으로써 새로운 놀이의 가능성을 발견했음 직하다.

  시절은 이미 꽃은 핀상황이다. 문을 열기만 하면 능금밭 가득 능금꽃이 피어 있는 봄이다. 봄이 절정에 이른 시절임에도 노파는 걱정이 앞선다. 그것은 누군가를 기다림에 지친 상황이기도 하다. 노파의 한쪽 어깨가 맥없이 문설주로 무너진다고 했다. 문설주의 용도는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한 용도만이 아니다. 누군가 와야 할 사람, 반드시 돌아와야 할 사람을 기다리는 자의 간절함이 묻어 있는, 가정의 종착점이 바로 문설주다. 노파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꽃이 핀 이 호시절에도 그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오겠지 했으나 오지 않는 사람. 묵은해가 가고 새해를 맞으면 오겠지 했으나 역시 오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이 꽃피는 춘삼월 꽃피는 시절을 맞았음에도 오지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호시절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꽃은 피고꽃이 피고와는 전혀 그 의미맥락이 다르다. 후자는 꽃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피어남을 뜻한다면, 전자는 꽃에 대응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때 가능한 표현이다. 이를테면, <꽃은 피고, 새는 울고>처럼 대구나, <꽃은 피고, 임은 안 오시고>처럼 대조적 표현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 손주 녀석의 어미 아비 곧 노파의 아들 며느리가 네 살배기 손주 녀석을 떨쳐 놓고 세상을 떠돌고 있다. 꽃피는 호시절에도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기다리는 노파나 손주 녀석이나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꽃은 피고 인자 우에 사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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